이번에는 성지 절두산에 얽힌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현재 양화진 절두산이 龍頭案 혹은 蠶頭案이라 하여 용의 머리와 누에머리에 비유되고 있다. 북악산이 金華山 줄기를 타고 한강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한강 기슭에 와서 뭉툭하게 잘라져 솟은 봉우리가 오늘의 절두산이다.
1925년 7월 25일 79위 우리 순교자가 삐오 11세에 의해 전 세계에 복자로 선포된 뒤 2개월이 지난 9월 어느 주일이었다. 소신학생ㆍ대신학생 전원이 교장신부ㆍ교수신부님 전부가 이곳을 찾았다.
지금의 상하수동ㆍ합정동ㆍ망원동ㆍ서교동ㆍ동교동 일대가 야채밭으로, 서울 장안의 부식을 조달했다.
황막한 논두렁 밭두렁을 거쳐 풀이 무성한 곳에 커다란 느티나무와 상수리나무들이 휘영청 늘어진 산의 정상에 오르니 2백 평 가량의 펑퍼짐한 잔디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때 75~6세 가량의 노인 한 분이 우리 곁에 다가와 이 산봉우리의 역사를 이야기해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할아버지는 선비인 조 선생으로 그 산정과 주위의 땅을 가진 지주였다.
조 선비의 말을 빌어보면 1866년 9월 25일경 프랑스 전함이 인천 갑곶나루(甲串津)에 정박하고 2척의 종선이 이 잠두봉 뒤 한강까지 쳐들어오며 수심을 쟀다는 것이다.
1839년 9월 21일 프랑스 주교 3인을 죽인 처사와 1866년 3월 한 달 동안 프랑스 주교 2인ㆍ신부 7인을 죽인처사에 항의하며 배상을 요구하는 문책공한을 대원군에게 보냈다.
이 공한에서 프랑스 정부는 첫째 종교의 자유를 주고 잠두봉에 성당을 지을 것, 둘째 통상조약을 맺을 것, 셋째 1839년과 1866년에 죽은 주교의 배상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프랑스군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대원군 처소인 운현궁에 대포를 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단다. 이 소문은 8만 장안에 쫙 퍼져 사람들은 봇짐을 싸고 목멱산(현재의 남산)으로 피난길을 떠나 남산가는 길목이 메워지기도 했단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성이 머리끝까지 나서 바로 저 아래에 천주학쟁이들을 꿇어앉히고 목을 강 쪽으로 내밀게 한 뒤 칼로 목을 쳐서 발길로 물속에 차 던져라 하고 영을 내렸다는 것이다.
말씀 끝에 조 선비는 『여러분도 그 때 태어났더라면 영락없었지 칼 맞아 죽는 거야…』하고 덧붙였다.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더럽힌 이 한강 물을 천주학쟁이들의 피로 깨끗이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척사비를 만들어 쇄국정책을 펴는 한편 박해의 손길을 뻗쳐 갔다.
『병인양요 때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오, 화친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다」하는 척화비 1백 개를 만들어 8도 강산 요소요소에 세운 것 학생들 알지?』
양화진 참사사건ㆍ강화도 침입사건ㆍ신미년 외양선 침입에 혼이 난 대원군은 이 척사비로 외세를 막을 것으로 믿었던 모양이다.
『대원군은 화륜선을 만들어 한강에 띄우고 망원정(현재 망원동에 그 자리가 남아있다)에 앉아 희색이 만면해서 바라보았지』
조 선비는 서쪽 둔덕위에 남아있는 정자를 가리켰다.
『당시에는 사형수의 목을 베기 전에 잔상을 한상씩 잘 차려 먹인 다음 목을 베었지. 그 때 잔상에는 밥 한 그릇에 콩나물 한 접시씩이더군. 처음에 목을 벨 때 꾸역꾸역 밥을 먹게 하고는 밥과 반찬이 채 목을 넘어가기도 전에 목을 치니 피 섞인 콩나물이 이 산벼랑에 널렸지 뭔가. 구경나왔던 사람들이 기겁을 해서 인근주민들은 콩나물을 먹지 않았다구. 죽어가는 천주교신자도 불쌍하고 해서 그랬던 거지』
조 선비 말로는 처음에는 한명씩 목을 치더니 나중에는 생선두릅 엮듯 늘어세워 여러 명의 망나니가 목을 치고는 강물로 머리를 차 넣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는 우리들의 가슴에 선열들의 뜨거운 신앙이 살아오는 듯했다.
1668년(헌종 9년) 이조 중기의 화가인 효언 윤두서가 화폭에 옮긴 잠두봉을 보면 지금의 절두산 봉우리와 우측에 큰 기와집이 있고 산정에는 큰 정자가 있어 춘풍추월에 묵객들이 흥취에 어울리는 모습이 나온다. 박희봉 신부와 필자가 이 화폭을 지니고 있다.
지금 수원교구의 부주교인 정루까 덕진 신부가 인천 답동본당 임종국 신부의 보좌를 맡고 있을 때(1947~1954년) 신자들을 인솔하고 양화진 성지참배를 왔을 때 인근주민들도 조 선비와 똑같은 비화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현재의 절두산성당과 박물관은 1966년 윤공희 대주교님이 수원교구장으로 서울교구 임시관리주교직을 겸임하실 때 준공 축성됐다.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어진 용두봉 잠두봉 나뭇가지에까지 걸렸던 피 묻은 콩나물을 생각하면 지금도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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