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던 일제하에 조선민족의 정신문화를 드높이기 위해 당시 서울교구장 민뮈뗄 주교님이 1908년에 프랑스 본국을 방문하시면서 이 땅에 대학설립의 꿈을 실현하기에 동분서주하셨다.
본국방문기간중 적당한 수도교육단체를 알아보느라 이곳저곳을 다니시던 중 천재일우로 1884년 창설된 성오틸리엔 베네딕또 수녀원을 찾으셔서 총원장 로베르트 신부를 만나 진지한 대화를 나누셨다.
사범학교와 대학설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 한 국민의 민족정신문화 향상에 심혈을 기울이셨던 민 주교님의 역설이 주효해 성베네딕또회 조선진출을 로베르트 신부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09년 선발대로 보니파시오 신 원장신부님과 수사님들이 들어와 백동(현재 혜화동)에 광활한 산봉우리를 매입하고 수도원 건축과 철공ㆍ목공을 가르치는 공업학교 및 후일 대학설립의 전초로 사범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후속부대가 입국하는 가운데 총독부에 건의한 가톨릭대학 설립안이 단호히 거절당했다.
천주교회의 건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총독부는 부랴부랴 서울에 경성제국대학을 세웠다. 교지가 좁아 문리과 대학쪽 땅은 강제로 헐값에 사들여가며 기승을 부렸다.
백동에 세운 목공소 자리에는 지금 혜화유치원이 서있고 백동성당과 사제관이 철공소였다.
대학설립이 뜻때로 이루어지지 않자 서울교구장 민 주교님과 오틸리엔 성베네틱또회 본부가 이야기를 나누어 전교방면으로 진출하게 됐다.
당시 함경도와 소위 북간도 일원을「원산교구」로 묶어 1921년 5월 1일 원산교구장을 신보니파시오 대원장이 겸임하여 주교가 되었고 나의 소신학교 은사인 유에밀리오 드브렛 신부님이 민 주교님 보좌주교로 성성됐다.
원산교구는 즉시 원산의 명석동에 수도원겸 사제관ㆍ성당ㆍ수녀원을 둔덕 위에 높다랗게 짓고 동시에 덕원역 근처에 광활한 토지임야를 사들여 수도원 본부ㆍ대성당신학교ㆍ인쇄소ㆍ철공소와 목공소ㆍ농장ㆍ포도원 등을 대규모로 지었다.
당시 총독부에서 군침을 흘릴 정도로 규모가 방대했다.
당시 1921년경부터 만주로, 북간도로, 원산방면으로 한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원산에 살고 있던 본가는 내 아우 오 알베르또 기순을 덕원신학교에 입학시켰다.
1928년 2월 스물 한 살 나던 해 철학과를 졸업하고 윤리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에 전심하던 나는 여름방학을 맞아 본가에 갈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그런데 본가가 베네딕또회 내에 있다는 죄로 교장신부님이 못가게 하시는 것이었다.
남은 다 본집에 가서 그립던 부모 형제, 특히 그렇게 보고싶던 어머니를 뵙는 기쁨을 누리는데… 스물 한 살 먹은 놈이라도 어머니 보고싶은 마음은 두 살 난 어린이와 다를바 없었다.
3개월 방학동안 고스란히 고아가 된 나는 교지「따벨라」원고를 정서해서 홍콩 나자렛인쇄소로 보내고 교지가 홍콩에서 오면 이삼복 요한ㆍ조 백록 베드로 소신학생을 데리고 우송을 했다. 봉투만들기에 3개월의 시간이 천년만년이나 되는듯 흘러갔다. 그래도 이 길이 사제가 되는 가시밭길이라 생각하고 늘 웃음을 잊지않으려고 노력했다
9월 초 개학이 다가와 방학 1주일이 남았는데 원산 덕원에 있는 본가에 다녀오라는 것이다. 교장신부님 보기에도 처량했던지…
덕원에 가니 덕원신학교는 새 학기를 시작하고 최병권 마티아ㆍ김충무 끌레멘스ㆍ임화길 안드레아 등이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는 것을 보았다.
덕원신학교 고등학교 졸업식에 초대까지 받고 가면서도 내 가슴은 편치 않았다. 식순에「내빈축사-용산신학교 오요셉 기선 학사님」이라고 박아놓았으니 용산신학교에서 퇴학당하는게 아닌가 가슴이 설레었던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이 용산신학교에 알려지면 10년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었다.
그러나 용산신학교의 명예를 걸고 단위에 오른 나는『여러분이 형설의 공든 탑을 쌓아 이제 대망의 철학ㆍ신학의 배움의 전당 정상까지 올랐으니 이 어찌 기쁘고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에게는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제서품의 영광을 얻을 때까지 심혈을 기울이시기를 부탁드리며 여러분의 졸업을 축복해마지않습니다』라고 축사를 했다.
용산 출신이 망신발이 뻗치면 곤란하겠다는 것이 나의 각오였다. 이를 악물고 이야기를 끝내자 박수갈채를 받았다.
끝내기는 무사히 끝냈지만 걱정은 여전했다. 게다가 이불속에서 윤을수와 불어 도둑공부를 하느라 눈이 나빠져 증조부께서 오동테 안경을 맞추어주셨다. 교장신부님 허락없이 안경을 썼다가는 날벼락이 내렸다.
안경은 썼겠다, 덕원 신학교에서 축사는 했겠다.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학교에 돌아가는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이었다.그런데 아무리 눈치를 보아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배짱으로 밀고 나가니까 그런대로 무사통과였다.
사촌인 같은 신학교를 찾아가는 일이 이런 우여곡절을 치뤄야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이 장난같은 일이었다고 생각되지만…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