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섭은 할머니가 1년 전 셋방 부부의 밤의 혼돈을 대략 간파하고 있은 터이며 하여 무슨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집혔다. 그러나 그는 다만 절실히 불안하였다.
『제 집사람이 성당에는 잘 다녔습니까? 물론 편지에 그런 말들이 있었습니다만…』왠지 떳떳치 못한 질문 같았지만 기섭은 물었다.
『잘 다녔지. 한 주일도 궐한 적이 없다네』『네에… 그런데 그 사람이 오늘 웬일인가요? 공항에도 오지 않고…』『과히 염려하지 말게 자네가 돌아온 것을 알 테니까, 곧 집으로 올 거야.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어서 방으로 들어가세』
하며 할머니는 기섭의 손을 잡아끌었다.
기섭은 할머니와 함께 안방으로 들어가서 할머니에게 큰절을 하였다. 그리고 가지고온 선물을 드렸다.
그러며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제발 아무 일 없이 어서 돌아왔으면… 간절한 바람과 조바심 같은 것이 가슴에 무겁게 엉기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기섭은 홀로 때늦은 점심식사를 하였다. 할머니 방에서 혼자 밥을 먹고 싶지가 않았으나 할머니가 한사코 차려다 주시는 것을 마다할 수 없었다. 물론 밥맛이 날리 없었다. 시장기도 전혀 느끼지 못한 터라서 더욱 밥맛이 없었다. 그저 입 안이 맵기도 한 껄끄러움뿐이었다. 그것을 할머니께 너무 눈치 보이지 않으려니 힘겹기도 한 식사였다.
식사 후에 기섭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동네를 돌며 전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어떤 집에서는 간단한 술대접도 받았다.
그런데 기섭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혹 아내에 대한 말을 듣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집에서 가만히 아내를 기다리기보다 밖으로 좁게라도 찾아 돌아다니는 심사가 차라리 마음 편하겠기 까닭이었다. 어쩌면 집으로 바삐 돌아오는 아내를 마중하는 쪽이 될지 모른다, 그렇게 기대가 문의하는 마음도 있고… 하여튼 그는 별로 친숙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인사하며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별 무소득이었다. 기섭이 먼저 사람들에게 묻지 않은 고로 그는 누구한테서도 아내에 대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아내를 찾을 수 없는 형편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진실로 아내를 만나지 못하였다. 아내는 좀체 그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기섭은 한숨을 내쉬었다. 낙심과 상심으로 가슴에 새로운 통증이 이는 것도 같았다. 거리엔 어느새 저녁 햇빛이 움츠러들고 있었다. 저녁 햇빛은 다가오는 어둠을 알고 지레 서둘러 퇴각하는, 그리고 시르죽는 것만 같은 양상이었다. 그는 어둠 같은 불안감과 절박감이 정녕 어둠처럼 자신을 덮치는 것 같아서 후둘 몸을 떨었다.
그러나 기섭의 머리엔 한 가닥 광채 같은 생각이 비쳐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보지 못하는 길로 해서 이미 집에 돌아와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그의 가슴에도 어려 있는 광채였다.
참으로 여실하고 소중한 광채였다. 어둠 속에서 광채는 더욱 뚜렷해지는 것… 다만 그것을 스스로 시험해 보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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