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도착한 뒤로 저는 조금도 쉬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항상 돌아다니며 같은 집에서 지낸 것은 장마철인 7월 한 달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1월부터 중국에서 한양까지 오는 길을 치지 않고도 5천리가량을 걸었습니다. …신자 3천8백 명을 찾아보았고 2천4백1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1천7백64명에게 성체를 영해주었습니다. 어른 1백81명과 어린이 94명에게 성세를 주었고 9백16명에게 보례를 주었으며 예비교우 2백78명을 받았고 죽어가는 외교인 어린이 4백55명에게 임종대세를 주었습니다.』
최양업 신부가 남긴 19편의 서간가운데 눈에 띄는 이 기록은 그의 포교활동이 시작부터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던가를 짐작케 하고 있다. 김옥희 수녀는 국문에서『최 신부의 포교활동은 시시각각 조여 오는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가난으로 착취당하면서, 극도의 고통중에있는 동포, 즉 서민대중들에게 정신적인 위로와 함께 사랑과 애정을 쏟는 일이었다』고 강조하고『가장 버림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신앙과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자했던 최 신부의 삶은 바로 그 시대가 필요로 했던 참사제의 모습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조국 땅을 밟고 싶었던 간절한 염원 속에 최 신부의 귀국시도는 다섯 차례나 실패로 돌아가는 우여곡절을 겪고 있다.
김옥희 수녀는 당시 급변하고 있던 조선국내ㆍ외 정세는 최 신부의 귀국을 어려운 상황으로만 몰고 갔으며 결국 최 신부는 귀국여정에서만 수년을 방황할 수 밖에 없었다고 그 배경을 기록하고 있다.
이국땅에서 안타까운 세월을 보내는 동안 최 신부는 1846년 모진 박해 속에 순교한 부모 등 순교자들에 대한 슬픈 소식에 접하게 된다.
물론 이 땅 최초의 사제로 이미 귀국해 활동하던 사랑하는 벗, 김대건 신부의 순교와 함께… 파란만장한 귀국의 여로에서 순교에 못지않은 고통의 대가를 치루었던 그는 고국에서 신품을 받고자했던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1849년 上海에서 이 땅의 두 번째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김옥희 수녀는 1849년 12월「변문」을 통과, 고국 땅을 밟은 최 신부는 도착 즉시 포교활동에 들어갔으며 그의 사목활동은 시작부터가 귀국과정 만큼이나 힘겹고 역시 순탄치 못한 것이었다고 그의 논문에서 기록하고 있다.
고국 땅을 밟은 직후부터 최양업 신부는 반년동안을 걸어서 5개도를 순방하는 인고의 포교활동에 들어갔는데 바쁜 여정 중에도 모진 대박해에서 살아남은 중백부와 4명의 동생들을 만나는 기쁨을 잠시 누리게 된다.
최 신부의 포교활동은 항상 긴장과 죽음의 위험이 뒤따랐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문헌과 기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 수녀는 그 당시 최 신부와 함께 사목을 담당했던 다블뤼 안 신부는 빠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바랭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의 성무집행이 가장 파란이 많았으며 그중에서도 관리들의 급습을 받아 여러 번 잡힐 뻔 했던 상황을 보고, 매순간 생명을 결코 살아야했던 최 신부의 포교활동을 안타깝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죽음의 위험을 불사하면서도 서양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었던 산골마을 교우촌 신자들을 찾아 사랑과 애정으로 인도했던 최 신부는 특히 여교우들에 대한 각별한 목자적 관심을 서간 곳곳에서 기록으로 남기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이점에 대해 김 수녀는『신분의 상하를 막론하고 당시의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억압받았던 계층이었기 때문』이라고 논문에서 못 박고 있다.
여기서 김 수녀는『평등사상을 기초로 한 최 신부의 인간애ㆍ서민대중을 향했던 사제적 역량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으며 그 점이 바로 어둡고 피폐했던 이 땅에 한줄기 빛으로서의 최 신부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고 상기시켰다. 또 김 수녀는 폐쇄된 사회, 가정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기고자 했던 당시 여교우들의 뛰어난 신심과 함께 그들의 고통스러웠던 환경을 가장 잘 파악했던「이 땅의 사제」였음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진천군 교우촌의 동골공소(현재 진천군 백곡면)는 당시 백곡면 일대에 산재해있던 여러 교우촌 중에서 교통의 요새였으며 자연적으로 숨어있기에 용이했던 곳이었다. 즉 배티(梨峙)계곡에 있는 전 교우촌인지 거머리, 황새울, 명심이골, 전골, 정삼이골, 솔골, 대명골, 삼박골, 용진골, 모니, 배티, 신석골, 동골 등 12개의 교우촌이 이 지역에 포함되었으며 그중에서도 동골과 배티와 삼박골이 중심이었던 곳으로 당시 최 신부는 이 지역에 주로 기거 하면서 동골 배티 등지에서 미사를 거행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라고 김 수녀는 강조하고 있다.
이 정설은 최 신부가 선종했을 때 베르뇌 장 주교가『그의 죽음은 나를 몹시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크나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인 우리가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라고 참담한 심경을 토로한 사실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따라서 최 신부는 진천 동골촌을 중심으로 장마철인 6월 중순부터 8월초 순까지지만 이 동골교우촌에 있었고 그 외는 주로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황해도 일대를 비롯, 가장 남쪽지대였던 부산 동래지방까지 포교활동을 펼쳤다는 놀라운 결론을 김 수녀의 논문에서 찾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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