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섭은 십자고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호를 긋고 입 속으로 주의 기도와 성모송 영광송을 염한 다음 마음속에서 많은 기도를 길어내었다. 그의 마음을 온통 기도로 채움이었다. 진실한 갈망으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기도를 길어내어 온 가슴에 채우고, 그리고 선명하게 아로새김이었다. 그는 진실로 하느님 앞에 있고 싶었다. 진실로 하느님 앞에서 마음하고 생각하고 소원하는 것이기를… 자신의 마음 안에 무늬지고 생각 속으로 떠오르는 모든 말들이 참다운 기도이기를… 그는 진심으로 바라고 희망하였다. 참으로 절실한 마음이었다. 하느님 앞에 있고자 하는 마음, 참으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마음이며 그리고 기도였다.
이윽고 기섭은 눈을 뜨고 다시 성호를 그은 다음 몸을 일으켰다. 일순 한 자락 바람처럼 아내의 내음이 일어 그의 코를 스치는 것 같았다. 그는 슬며시 아내의 경대 쪽을 돌아보았다.
화장품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그 경대 앞에서 아내가 불행한 얼굴을 매만지며 있는 듯… 그러나 경대 앞은 허전하였다. 그는 천천히 경대 앞으로 다가가서 맑은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이 방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새롭게 실감되어지며, 지금 이 방 안에 아내가 함께 있지 않다는 그 허전함도 더불어 새롭게 확연해지는 것 같았다.
기섭은 장롱 속에서 요와 벼개를 꺼냈다. 아랫목에 요를 펴고 몸을 눕혔다. 긴장감과 불안감 속에서도 피곤함이 온몸에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지가 절로 풀어지는듯하였다. 아아, 1년 만에 누워보는 이 자리…그러나 외롭고 쓸쓸하였다.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온 방안에 자욱히 퍼져오르는 것 같았다. 방벽에는 아내와 아이들의 그림자가 어려 있는 것 같고 방바닥과 요에서는 몸내음들이 풍겨나는듯… 하여 더더욱 외롭고 허전하였다. 그는 신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절실히 보고 싶고 상봉의 기쁨이 알 수 없는 일로 계속 유보되고 있음이 한없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기섭은 아내와의 오롯한 잠자리가 그지없이 그리웠다. 그것을 참다이 이룩하고 싶고, 아내의 소망을 포근하고 알차게 감싸 주고 싶은데…
기섭은 문득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마지막으로 받은 아내의 편지를 다시 떠올렸다. 그 편지의 끝 귀절이 강한 파장으로 가슴에 무놀지는 것 같았다. 아내는 정말 그 두려움 때문일까?
그 두려움을 더욱 농밀하게 호소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나에게 각성을 주기위해서 여뭇 시위와도 같은 행동으로 귀국 첫 날의 곤혹스럽고 괴로운 밤을 나에게 안겨 주는 것일까?…차라리 그런 것이라면…
그러자니 기섭은 1년 전의 곤혹한 밤들이 떠올랐다. 지난 해 중동에 가기 전까지 지속되었었다던 혼돈의 생활이 회한의 아픔을 데불고 맹렬히 달겨드는 것 같았다.
아아, 진실한 사랑으로 등불처럼 강렬하던 아내의 눈빛…. 그러나 안쓰럽게 소망을 가누던 아내의 눈빛…. 그 회원의 눈빛들을 거부하고 하염없이 눈물 흐르게 한 나의 행동들은, 저열한 생각들과 슬픔들은 어디에 그 근원이 있는 것일까?…
기섭을 슬프고 먼 기억의 알싸한 안개 속으로 달려가는 자신을 어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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