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신학교의 규율은 어떤 수도원의 규율에 비해도 손색이 없었다. 신부가 되도록 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어서 라틴말 위주의 수업에 철학ㆍ신학도 큰 비중을 두었다.
따라서 다른 학문을 공부하거나 기타 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개학 때 자신이 좋아하는 책은 무엇이든지 검열을 받아「可勉」이라는 도장을 받아야 마음 놓고 보게 되었다.
만일 이 도장이 없는 책이면 무조건 압수였다. 개미라도 도장이 없으면 압수하느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중학과정을 마치고 철학과로 진학하면서부터 누구나 자신의 영성생활과 사목생활의 목표를 세우고 한길로 매진하려는 경향이 무르익어갔다.
1928년 가을 동기인 윤을수가 어디선지「작은 꽃(小花)」이라는 소화 데레사의 일본어 자서전을 구해왔다. 물론「可勉」(가히 힘쓸지라) 검열은 받지 못했다. 성녀의 자서전이니 괜찮겠지 하고 안심은 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됐다.
그래서 윤을수와 같이 고해신부겸 영신지도신부였던 차 에드몬드 신부에게 그 책을 들고가서 읽어도 좋은지 솔직히 여쭈었다. 차 신부님은『나는 너희들의 영신지도신부니까 교장신부님이 꾸중하셔도 내가 막아주마』하셨다. 그 고마운 말씀은 우리들에게 철벽이라도 두른 듯 든든하였다.
나는 틈만 있으면 운동장 귀퉁이에서나 동작리 별장으로 가는 산길에서나 침실에서나 탐독에 탐독을 거듭해서 4백 페이지가 넘는 그 책을 여섯 번이나 독파하는 동안 성녀 소화 데레사의 생애와 교훈을 거의 다 외우게 되었다.
특히 마음이 쏠린 것은 그분이 가르멜수녀원에 투신한지 9년 만에 자신이 발견하고 수련수녀들을 몸소 가르치신 길이었다.
어린이의 길ㆍ겸손의 길(작은 자의 길), 신뢰심의 길 이 세 가지 마음을 성모님께와 예수님께 갖도록 또 그 길로 매진함으로써 완덕에 이르라는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이었다.
루까 18장 15~17절의 말씀처럼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소화 데레사는 천주님과 성모님께로 나아가셨다.
사제가 걸어가는 길은 이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길이고, 만민을 고개 숙여 섬기려는 자세로 억 만 가지 환난ㆍ풍파ㆍ고통ㆍ중상ㆍ모략 등 사목상의 난항 속에 절대신뢰ㆍ절대믿음ㆍ절대의탁하는 길로 나아가야한다는 확신을 내게 심어주었다.
데레사 성녀는 어찌나 겸손한지 아무 성인 아무 성녀는 죽은 후에도 시신이 썩지 않았다는 대목에 가서『나는 죽은 다음에 폭삭 썩어서 내 시신이 재처럼 되길 원한다』고 하였는데 1923년 4월 30일 복녀로 추대하기 바로 전에 그 무덤을 열어보니 소화 데레사 성녀의 시신은 그 염원대로 아주 폭삭 썩어 검은 재가 되었다 한다.
예수님은 어린이와 같은 소화 데레사의 믿음을 보시고 사소한 소원까지도 들어주신 것이다.
나는 철학과에 진학하면서 더 열렬히 내 영성의 길을 닦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소화 데레사의 길을 따르기에 힘쓰면서.
봉쇄수도원인 가르멜수도원 안에서 9년 동안 수도하며 공덕을 쌓고 희생하며 소화 데레사는 외방전교에 나선 사제 못지않게 전교하고 죄인을 회두시키겠다고 결심했다.
폐결핵 3기로 목소리까지 잦아들고 느닷없이 각혈을 하면서도 기도하였다. 성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고국인 스페인을 떠나 1544년 8월 15일 일본까지 가서 전교하다가 일생을 마칠 때까지 죄인을 회두시킨 것보다 소화 데레사 수녀가 9년 동안 봉쇄수도원에서 극기ㆍ희생기구로 죄인을 회두시킨 것이 더 많았다고 한다.
어린이의 길ㆍ겸손의 길ㆍ신뢰의 길이 1923년 4월 30일 복녀가 된 지 불과 2년만인 1925년 5월 17일 전 세계의 가장 작은자로서 가장 위대한 성녀가 되게 했다.
우리 교회도 곧 성인을 맞는 영광을 안게 된다. 지난 2월 16일 서울 대교구는 순교자 유해순회기도회를 갖고 교구 내 1백16개 본당과 20개 공소ㆍ각 수도원과 교회기관까지 파고들며 시성의 뜨거운 염원을 불살랐다.
그 결과 6월 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가 기적관면윤허를 내리셨고 그 석 달 만인 9월 27일 비밀추기경회의에서는 한국순교자 1백3위 복자를 시성하도록 승인하시었다. 아마도 가르멜수녀원에서도 전 세계의 대수호자이신 성녀 소화 데레사께 당신이 맡으신 전교지방사람들, 특히 한국 땅에 1백3위의 성인을 주심사고 주야로 빌어 주셨을 것이다.
불편한 몸으로 기구하는 소화 데레사 수녀를 보다 못해 동료수녀가 누워 쉬기를 권하자『나는 지금 저 먼 동방에서 전교하는 한 사제가 많은 죄인들을 예수님께 회두시킬 수 있는 힘을 그에게 줍시사고 이 각혈의 고통까지 예수님께 드립니다』라고 온순하고 겸허하게 대답하셨단다.
성녀 소화 데레사를 내 사제생활의 특별한 수호자로 모시고 51년 동안 살아오면서 고해 속에서도 언제나 어린이같이 믿고 겸허하게 살아오도록 힘썼다. 특히 1949년 12월 7일 눈보라치는 겨울날 고아원 장작을 사기 위해 지프차를 타고 가다 80m높이 낭떠러지에 떨어졌을 때 같이 탔던 네 명 모두 손가락 하나 잘라지지 않게 구해주신 그 크나큰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
만에 하나라도 갚으려고 성녀 소화 데레사의 교회 내 수호자 상본을 만들어 교우들께 나누면서 그 은혜를 새삼 되새겨 본다.
『내가 죽은 다음에 천국에서 이 땅 위에 장미꽃 비를 내리겠다』(성녀 소화 데레사의 유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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