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5월 25일 삭발례를 받고 예수성심축일을 보낸 뒤 곧 3개월간의 긴 방학이 시작됐다.
모두 보따리를 싸들고 고향산천을 찾아 그립던 형제부모를 찾아가는데, 나 홀로 그것을 못하게 됐다. 비록 세속을 분토시하고 영예를 초개시하기 위해 머리까지 빡빡 깎은 이 몸이지만 부모님, 특히 어머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예수님께서도 30년 동안 성모님과 요셉성인을 효성으로 모셨거늘 왜 난들 하고싶지 않았으랴.
앞서도 말했듯 덕원신학교가 있는 곳에 본가가 있어 돌아갈 수 없었다. 원산에 돌아가면 용산신학교를 등지고 덕원신학교로 전학하지 않을까하는 학교 측의 우려 탓이었다. 덕원신학교에서도 그 당시 한 사람의 성직자라도 자기에게 온다면 쌍수를 들고 맞아줄 태세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고 텅 빈 신학교에 나 혼자만을 가둬둘 수도 없었으므로 용산신학교에서는 해주본당주임 구천우 요셉 신부에게 편지로 연락, 사범학교 졸업 전에 교생을 파견하듯 포교일선에 뛰어들어 가르침을 받도록 편지로 연락해 놓았다. 해주라면 한국천주교회사로 보면 김대건 신부가 형극의 첫 길을 밟으신 감옥이 있는 곳이었다.
본가에 못 갈 바에야 김 신부님의 고난을 되새기겠노라고 억지로 자신을 위로했다.
1929년 6월말 간단한 보따리에 긴 수단을 입고 새까만 중절모를 비껴쓰고 해주로 갔다. 구 신부님은 아우나 만난 듯이 꼬마 피라미(?) 성직자를 맞아주셨다. 구 신부님은 내 삼촌 오영렬과 신학교 동기생이셨다.
사제관은 초가집으로 아랫방에는 구 신부의 자당이, 윗방에는 구 신부님이 각각 기거하셨다. 구 신부님의 숙소는 사무실 겸 응접실로도 쓰였는데 자그마한 온돌방 한 칸에 비안네 성인처럼 시골의 가난한 사제로, 선비로, 학자로 청빈하게 생활하셔서 내 마음은 기뻤다. 늘 빙그레 웃는 모습은 백만불짜리였다.
사제관에서 5백 미터쯤 등성이로 올라가면 조그만 집 한 채가 있는데 이것이 구 신부의 전임 서기창 프란치스꼬 신부가 강당 겸 임시성당으로 세우신 것이다.
양철지붕에 붉은 벽돌담의 이 건물에 나를 머물게 하셨다. 고생 시키지 않으시려고…그런데 벽돌이나 지붕이 낮이면 뜨겁게 달아올라 온 집안이 절절 끓고 밤 열한시나 열두시가 되어야 서서히 식어 겨우 잠들만 했다. 잠이 들어도 걱정이었다. 이불 속에는 빈대ㆍ벼룩이 총 공격을 해와 무방비상태의 나를 공략하고 천장에서는 모기가 왱왱 전투비행단을 구성했다.
얼굴이고 팔뚝이고 다리고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물고 뜯어 일어났다 누웠다 밖으로 뛰어나오기를 여러 차례, 그러다보면 날이 밝는다. 이것을 3개월 동안 겪으니 굳센 그리스도의 용사가 되었다.
하학시간이 되면 보통학교ㆍ중학교 학생들을 모아놓고 교리를 가르치고 첫 영성체ㆍ영세 준비를 시키는 등 포교전선 제일선에서 보람을 느꼈다. 그때 해주중학생 최상선 마르띠노는 나를 따르고 라틴어를 배웠다.
장차 의사가 되겠다던 그는 1937년 여름 내가 성모병원에 입원했을 때 돌봐주었다. 지금은 그도 노인이 되고 나도 나이가 들어 서로 관악산의 일부인 三聖山 성지개발에 힘을 합치고 있으니 세상일은 알고도 모를 일이다. 삼성산이란 복자 범 주교ㆍ나 신부ㆍ정 신부 세 성직자가 58년 동안 묻히셨던 곳이다.
해주에서 방학 3개월을 보내면서 나는 구 신부님께서 교회문서처리에 정확ㆍ신속을 기하며 한국천주교회사에 조예를 갖추며 특히 김 신부가 투옥됐던 옥 자리에 당시 해주경찰서가 들어섰다고 일러주시고 현장을 여러 번 답사토록 해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아침에 일어나면 강당을 청소하고 제대ㆍ제병준비에 복사노릇까지 하는 보람 있는 교생노릇을 잘 한 것 같다.
구 신부님은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내게 큰 교훈을 주셨다.
김영석 아우구스띠노 회장ㆍ최상선 원장의 조부이신 최시메온 옹은 내게 한국교회사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주셔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해주하면 안중근 의사도 함께 떠오른다.
또한 자전거 배우느라 고생한 일도 떠오른다. 어른 신부님들로부터 공소 다닐 때 자전거를 타고 순회한다고 들었던 나는 여름 내내 뙤약볕에서 성당 언덕내리받이를 자전거로 오가며 몇 천 번을 둘러치고 메치고 넘어지고 뒹굴었다. 그러느라 구 신부님 자전거가 몇 번 고장이 나서 수리하게 되었어도 신부님은 한번도 찡그리거나 싫어하지 않으셨다.
너그럽고 인자하셨던 구 신부님은 은퇴하시고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계시다. 감사하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전해드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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