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님께서 필립보 백 신부님의 말씀을 빌어 들려주신 말씀을 금과옥조로 삼아왔다.『하늘에서 마귀꾀임에 빠져 천사의 3분의 2가 타락해서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말씀이었다. 성직계급에 들어서면서 늘 조심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랄 사실을 말해보련다.
신부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로 여겼다. 특히 공소방문 때 신부를 뵈면 일거수일투족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신부가 남긴 진지를 한 숟갈씩 손바닥에 받아먹으면 총명해지고 문답도 잘 배우고 착한 사람이 된다는 바람에 아이들이 그것을 얻어먹으려고 공소방문때면 머리싸움이 났다. 나는 그 진지를 곧잘 받아먹었는데 그래서 신부가 됐는가보다.
신부님은 대소변도 보지 않는 줄 알고 충남 공주에 계셨던 남 신부(뀔니에ㆍ네오)가 공소를 갔을 때 거적을 두른 화장실에 들어가시자 어린이 신자들이 하도 신기해서 작대기로 멀찌기 서서 거적을 들췄다가 흔구멍이 난 일이 있었다. 그만큼 신적 존재같이 받들던 신부 한 분이 사건의 초점이 됐다.
당대의 재사요 명사요 웅변가로 재치있고 미남인 안학만 루까 신부가 그 분이다.
學滿, 이름 그대로 배움이 가득한 그분은 안성땅 개터마을에서 1879년 1월 1일 태어나 1902년 9월 13일 용산신학교에 입학, 1917년 9월 22일 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개성 서병익 바오로 신부 보좌로 임명을 받았다.
폐부를 찌르는 명강론, 나무라도 웃기는 유모어, 어떠한 곤란한 말이라고 재치있게 받아넘기는 천재적 청년신부였던 안 신부는 안중근(토마스) 의사가「하르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하여 백의민족의 얼을 살린 사실이 모든 이의 정신과 양심을 파고들자, 온 겨레가 민족 이라는 이름아래 굳게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 신부는 1922년 용인군 포곡면 전대리 앞고리본당에 제2대 본당신부로 부임했다. 경기도 내에서 갓등이(1888)ㆍ하우현(1903)ㆍ미리내(1896)ㆍ안성(1899) 다음으로 다섯번째 본당이었다.
안 신부는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로 늘 일제의 감시를 받아왔다.
인재양성을 위해 앞고리성당내에 삼성(三聖)강습소를 설립한 안 신부는 신자나 지방유지를 만나기만 하면 민족주의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강습소의 학생들에게도 기회가 닿는대로 배일사상을 키워주었다.
또한 우리 교회 내에서도 외세를 제외하고 한국인이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안 신부는 개성에 보좌로 오래있던 관계로 서병익 신부가 주교가 돼야한다고까지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토착화의 물결이 출렁대니 의당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함이 떳떳한 일이지만 50여년 전인 1930년대만 해도 이 사상은 반성직사상으로 낙인을 찍힐 판이었다.
1929년 삭발례를 받고 내 딴에는 이사야 예언자 말씀대로『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고 그 안에 새 예루살렘을 세우리라』는 이상에 가슴이 부풀었던 필자는 그 해 가을 해주본당 파견을 마치고 돌아와 난데없는 안학만 신부의 성직정직처분에 소신학교 2층방에 감금됐다는 소식에 접하게 됐다.
성직생활 첫 발을 들여놓은 내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신부가 정직처분을 당한다, 감금이 된다는 말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교장 진 신부와 경향잡지사 주필한 기근신부가 자동차를 대절해서 용인 앞고리 성당으로 달려가 납치(?)해 왔단다.
나는 안 신부의 성직정지에 내 성소가 무너지는 좌절감을 느꼈다. 어머니께 여쭙자『앞차가 엎어지면 뒷차의 경계가 되는 것이니 너는 네 갈길만 굳세게 걸어라. 이 에미가 드리는 묵주의 기도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넌 그것을 믿어라』하고 다독거려주셨다.
그런데 3ㆍ4개월동안 감금되었던 안 신부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말하자면 탈옥을 한 셈이었다.
한국인주교가 나기 전에는 성직으로 돌아오지 않기로 작정한 안 신부의 소식은 1929년 말부터 44년까지 종무소식이었다.
안신부의 성직정지는 바로 일제의 흉계었다. 민족주의ㆍ배일사상을 부르짖는 안 신부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일제는 성직계열도 토착화해야 한다는 안 신부의 주장을 투서로 두 주교에게까지 알린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양심은 속일 수 없는지라 투서한 일제의 앞잡이는 죽는 마당에 유서를 주교님께 바치고 세상을 떠났다.
안 신부의 무죄가 드러나고 주교관에서는 안 신부의 거취를 찾았으나 알 길이 없었다. 1944년 한국사제인 노기남 주교가 교구장이 되자 갑자기 안 신부가 명동에 나타났다.
용산신학교를 탈출(?)한 안 신부는 만주ㆍ몽고등지에서 독립군장교로 통역도 맡으면서 활약했다. 그러면서도 성모님께 늘 묵주의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달리는 말 위에서도 자기의 무죄를 증명해달라고….
무죄가 밝혀진 안 신부는 다시 성직에 봉직케되어 해주본당에 부임했으나 1944년 4월 20일 선종하고 말았다. 한 많은 세상을 떠난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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