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1839년, 헌종 5년) 5월 24일에 참수된 9명의 순교자들 중에는 6명의 여교우들이 있었는데, 김아기 막달레나와 박아기 안나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김아기 막달레나는 1774년(영조 50년)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열심히 봉행하였다. 나이가 들어서는 동정을 지킬 마음이 있었으나 부모가 강력히 반대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교우에게 출가하였다
중년에 이르러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은 뒤에는 육순의 노모와 더불어 서울근교의 애고개로 이사하여 살면서 망건을 만드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어머니의 성정이 몹시 괴벽하여 뜻을 맞추기가 어려웠으나 그의 효심이 탁월하여 이를 잘 참아낼 수 있었다. 이러한 막달레나의 진심을 보고 주변사람들이 모두 그의 인내의 덕과 순명의 표양에 의아해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이 훌륭한 부인은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외교인들을 권화시키고 위독한 외교인의 아들에게 대세를 주기도 하였으며 몇몇 교우의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한 일을 하면서 막달레나는 항상 순교치명(殉敎致命)의 뜻을 품게되었다.
1836년(헌종 2년) 10월에 막달레나는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그는 포장 앞으로 끌려가서도 열심히 천주십계의 도리를 설명하였으며 여러 번 중벌을 받아 곤혹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용감히 감당해 내어 조금도 굽히는바가 없었다.
그후 형조의 옥으로 옮겨져서도 계속 형벌을 받으면서 3년을 지내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육순이 넘는 그로서 받은 고초를 가히 짐작할 수 있거니와 막달레나는 끝내 신앙을 지켜나갔으며, 드디어 기해년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셨다. 이 때 그의 나이 66세의 고령이었다.
또 다른 순교녀인 박아기 안나는 1783년(정조 7년) 한강 기슭의 작은 촌락에 있는 교우의 집안에서 태어나, 나이가 차면서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봉교하였다. 천성이 노둔하여 요리문답과 경문을 배우기가 몹시 힘들었으나『나는 천주를 내가 원하는 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마음만은 그를 사랑하는데 힘쓰겠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열여덟살이 되어 태문행(太文行) 프란치스코와 결혼하여 2남3녀를 낳았으며 이들을 교리에 맞도록 교훈하여 양육하였다. 안나는 집이 가난한 편은 아니었으나 세상 사물을 탐내는 마음이 적었고 주님의 교리를 열심히 지켜나갔다. 특히 주 예수의 수난에 대하여 남다른 신심을 가지고 있어 구세주의 오상(五傷)을 생각하고는 매양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박해가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눈은 빛났으며 순교하기를 원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기해년 2월에 안나는 남편과 장남 태응천(太應天)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남편과 장남은 곧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안나는 믿음이 견고하여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으며, 이에 관원이 백방으로 달래고 유혹하였지만 그의 굳은 마음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이 때 안나는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나고 살이 쇠눈만큼 씩이나 구멍이 나도록 혹독히 맞으면서도 신공바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한다. 배교한 그의 남편과 아들들이 매일같이 찾아와서 집안의 참혹한 형편과 죽어가는 노모의 고통이며, 엄마를 찾는 어린 것들의 가련한 정경을 눈앞에 그려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 기막힌 유혹을 용감히 대적하여 나갈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벗들의 나약함을 책하여『며칠 더 살아보려고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위험을 무릎쓴단 말이요. 나보고 배교하라고 권하기는 커녕 끝까지 함구하라고 격려해야 되지 않겠오. 당신들이야말로 어서 천주께 회두(回頭)하시오. 그리고 나의 행복을 부러워하시오』라고 말하였다. 결국 포청에서는 어떠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는 안나를 형조로 이송하기에 이르렀다.
형조에 이르러서도 주를 위한 그녀의 마음은 금석같았다. 그는 언제나『저는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을 위하여 죽기로 작정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5월 11일 형조는 마침내 박 안나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당시의 판결문을 보면,「마님이라고 불리는 박녀(朴女)는 사서(邪書)를 읽는 것으로 집안 일을 삼고 추한 그림을 훌륭한 신같이 공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죽음을 향하여 나가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라 하여, 천주교도로 확정지었다고 기록돼있다. 이리하여 그는 57세를 일기로 김 막달레나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치명하였던 것이다.
김 막달레나ㆍ박 안나 등의 순교자들은 죽는 순간까지 고통을 받았다고 하며, 이를 이겨내어 주님의 영광을 얻었던 것이다. 남은 교우들은 순교 3일뒤인 27일 새벽에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미리 준비한 작은 묘터에다 묻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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