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기록된 예수께서 사용하신 허다한 우화나 비유의 그 구성의 완벽이나 수사학적 절묘에 경탄을 금치못하거니와, 한편 때마다 부닥치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들의 독이 서린 기습과 공격에 대처하고 응수하며 이를 제어하고 물리치실 때 예수께서 취하신 그 기지와 대치의 언동은 그야말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것으로서 드라마적인 긴장과 효과는 百%라하겠다.
이것은 물론 예수의 완전한 슬기가 그 행적에 반영된 것이지만 한편 복음사가들의 문학적 재능을 엿보게하는 것으로(이것은 물론예수의 신성(神性)이나 복음의 계시성 등을 포함시키지 않고 인간적 측면에서 하는 말임) 그 중에서도「간음한 여자」사건에 대한 일화는 백미(白眉)로서 그 꽁트같은 기록 하나만으로도 예수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을 넉넉히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은 예수의 선교활동 마감시기에 일어난 것으로 루까복음에 의하면『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저녁이 되면 올리브 산에 올라가셔서 밤을 지내셨다』(21장 37절)고 쓰여있고 이어서『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이른 아침부터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성전에 몰려들었다』는 문맥으로 보아 이미 죽음을 각오한 포교의 절정기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사태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보고만 넘길 수 없는 현상으로서 그들은 이제예수의 가르침이 옳고 그른가를 따진다기보다 복음기록대로『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수 있는 구실을 얻으려고』(요한8장 6절) 그들 나름의 간지(奸智)와 계교를 짰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악의에 찬 위계(僞計)의 도구로 끌고온 것이 바로『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발각된 여자』였다. 다아는 이야기로 당시 율법에는『기혼녀거나 약혼녀가 간음을 하면 그 여자는 상대방과 함께 돌로 쳐죽임』을 받는 것이 마땅한 처사로 그들은 예수가 이 여인을 용서하자면 그것은 모세율법에 거역함이 되어 이스라엘 당국에 제소할 구실이 되고 또 율법대로 돌로 쳐서 죽이기를 명하면 당시 로마 총독이 가지고 있는 사형의 권한을 침해하는바 되어 현실 정권의 반역자로 몰아넣을 구실이 마련되는 것이었다.
여하간 그들은 이 교묘한「트릭」으로 양단간 예수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다고 믿었고 또 객관적으로 보아도 한갓 지혜로는 그 쌍덫에서 헤어날 수 있다고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위계를 역전(逆轉)시켜 그들 자신을 곤혹 속에 몰아치실뿐 아니라 그들의 잔혹한 도구로 쓰인 여인의 고통을 구원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좀더 그 이야기의 기ㆍ승ㆍ전ㆍ결(起承轉結)을 따라가 보면 사건전개의 이음(承)부분에서 예수께서는 먼저 그들의 음모를 거절하여『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무엇인가 쓰고 계시며』무관심을 나타내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예수께서는 마침내 고개를 드시고『너희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쳐라』하는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말씀과 서릿발 같은 태도로 사건을 일전(一轉)시키신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정의와 사랑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죄와 죄인을 혼동해 버리는 인간사회의 소위와 소행을 가로막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예수의 저러한 말씀이나 행동을 죄에 대한 허용이나 죄에 대한 벌의 불필요성을 주장한 것이라고 잘못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예수께서 인간이 남의 죄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삼가케하고 또한 하느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몸소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에게 있어 정의와 자비는 사랑의 표리(表裏)임을 우리에게 인식시키시려는 처사였던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하느님의 정의는 죄를 흘려넘기지는 않지만 동시에 죄인을 가엾이 여기시는 사랑 그 자체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면서 판단하시고 용서하시는, 즉 악을 선으로 갚음으로써 상대방을 죄악에서 소생시키는 사랑의 정의인 것이다.
이제 이야기의 매듭(結)도 아주 문학적 묘사로써『이 말씀을 듣자 그들은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하나 하나 가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라고 그려져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하고 물으시고『아무도 없습니다. 주님』하고 그 여자가 대답하자『나도 너의 조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부드럽게 타일러 보내시며 그 여자에게 새 생활을 촉구함으로써 이야기는 끝나는 것이다.
이렇듯 죄의 허용이 아니라 죄인에게 대한 용서만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참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용서는 자신의 하느님과 남에게 받은 용서와 은혜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며 나아가서는 인생을 참된 행복 속에서 살 수 있게 하는 바로 그 열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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