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사 아가타는 1784년(정조 8년) 경기도 이천(利川)의 구월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1838년에 순교한 이호영 베드로가 그의 동생이었으며, 그들의 부모는 교우였다. 일찍이 부친이 대세를 받은 후 사망하자 그들은 곧 서울로 이사하여 한강 북쪽에 있는 문막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비록 봉교하고 있었을지라도 도리에 밝지 못하여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지 아니하였다.
이 아가타는 십칠세에 이르러 외교인에게 출가하게 되었는데, 이는 어머니의 무관심 때문에 성교의 교리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3년간의 결혼생활에 그는 한 명의 자녀도 낳지 못하고 또 남편까지 잃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후 아가타는 친정으로 돌아와 비로소 천주를 받들어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사람됨이 명백히 겸공하여 사람마다 그 아름다운 표양을 기리고 사랑하였으며, 이를 사모하였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신후 가산마저 탕진하게 되었고 위로 노모와 아래로 어린 동생을 데리고 근근이 지내었으니 그 고통의 형상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아가타가 삯바느질을 하여 집안살림을 근근이 지탱해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동생과 함께 열심히 봉교하였다. 언제나 안색이 화평하고 수연하여 진실로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항상 생활의 일과로 삼았으며 언제나 천주교 교리에 합당하게 살았고 대단히 열심히 기도하고 일하였던 것이다.
이호영 베드로와 그들 남매의 이러한 성교생활은 교우들의 모범이 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가장 먼저 체포대상에 오르게 되었는바, 1835년 2월에는 포졸들이 그의 집을 갑자기 습격하였기 때문에 이 베드로는 그날 저녁에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문 앞에 지켜 서있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고, 이어 이 아가타도 동생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러한 광경을 본 그들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다. 매정한 포졸들은 이에 개의치 않고 베드로의 아내도 잡으려고 하였으나 그녀와 베드로는『이 사람은 죄가 없으니 내버려 두시오, 죄가 있는 것은 우리뿐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녀의 올케만은 석방하여 어린애들과 노모를 돌보게하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 때 마침 이웃에 사는 포졸이 감격하여 그녀의 올케만은 체포하지 않도록 하였다.
포청으로 끌려간 그들 두 남매는 갖은 형벌과 배교의 강요를 당하였다. 포장이 그들에게『너희들이 천주학을 한다는 말이 옳으냐』고 한 질문에, 남매는 한결같이『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배교하고 일당을 대라』는 강요에『천주는 우리의 대군대부이시기 때문에 배주(背主)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당을 대면 우리 말로써 남을 상해하게 됨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포졸들은 두 남매에게 주뢰를 틀고 매질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아가타의 살점은 떨어져 나가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동생 베드로를 격려하며 이를 견디어 내었다. 또 한번은 아가타를 옥에서 끌어 내어 무수히 난타한 다음 옷을 벗겨 높이 매달아 능욕하기도 했으나, 그의 입에서는 오직『배주(背主)하지 못하겠습니다』라는 한마디의 대답 뿐이었다.
이때 베드로는 그들 남매가 받은 문초와 고문생활의 기록을 자세히 적어 동료 교우들에게 보냈었는바, 현재 그 일부가 모방(羅) 신부의 보고서에 남아 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아가타 남매는 1835년 말에 법정으로 끌려나가 각각 문초를 받았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천주교가 사교가 아니며 하느님의 계명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 조상에 대한 제사는 헛되다는 것, 끝까지 천주를 위해 죽겠다는 것 등의 진리를 한가지로 증언하였다고 한다. 관장은 이들을 몹시 매질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포졸들이 그의 명을 집행하는 동안 배교를 다시 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마리아의 이름을 줄곧 부르며 진리를 버릴 수 없노라고 대답하였다. 아가타는 이제 탈진하여 칼을 쓴 머리가 축 늘어졌으면서도 여전히 순교를 갈망하여 끊임없이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였다.
마침내 이들은 형조로 이송되었다. 이때 새우젓장사를 하는 허태복이란 교우가 자주 감옥에 드나들며 남매의 심부름을 하였으므로 옥중에서의 일을 잘 알 수가 있었다. 수많은 혹형을 받아 팔다리가 성하지 아니하였음에도 그들 남매는 낙담하지 않고 서로를 격려하며 오히려 신앙이 더욱 굳세어 졌을 뿐 아니라 옥에 있던 4년동안 아가타의 착한 표양에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옥졸까지도 그의 성교도리를 아름답다고 칭송하였다한다.
그들 남매는 같은날 순교하기로 약속까지 하였다. 그러나 아가타의 사형이 집행되기 약 6개월전에 동생 베드로는 기력이 완전히 쇠잔하여 36세의 나이로 옥사하고 말았다.
1839년 (기해년) 5월 24일 마침내 아가타가 사형되는 날이었다. 형장으로 가는 수레에 올라서도 그녀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온화한 기색으로 눈을 내리뜨고 있었으며, 수레에서 내리면서 십자를 긋고 조용히 칼을 받았다. 이 형장은 바로 여러 교우들이 순교한 서소문 밖이었으며, 이 때 아가타의 나이 5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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