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마태3ㆍ9)
결국 회개와 쇄신은 행동의 변화, 삶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 인간의 모든 행동을 자아내는 동기는 그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가치관에 근거한다고 하겠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장하는 도구일진대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생활태도나 그 분이 추구하신 가치들을 외면하고서는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는 존재가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만을 찾으며 투신해 오셨음을 잘 알고 있다.(요한 4ㆍ34)
교회가 세상을 위해 세상 안에 존재하지만 결코 세상에 속하지않고 그리스도처럼 아버지께 속하여 아버지만을 향하여 아버지의 것만을 추구하도록 불림받았음을 확인해야할 것이다.(요한 17ㆍ10, 16-17)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주셨다.
곧 성령을 보내시고 신앙과 희망과 사랑을 부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삶을 사는 것이다.
교회가 살아가야 할 신망애의 삶은 바로 지금 현실안에서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기에 현세 질서 안에서 모든이로부터 추구되는 가치들과 그것이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 어떤 가치들을 갖는지 헤아려 보지 않을 수 없다.
신앙인이든 아니든 그 자체가 가지는 가치 때문에 추구되는 가치들을 크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곧 권력과 재물(물질적 정신적)그리고 성(性)이다. 이 세가지 가치들은 모든 시대를 통하여 만인으로부터 추구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중에 어느것 하나도 우리가 손수 만들거나 택한 것이 아니다. 오직 주어졌을 뿐이다. 이것들이 행복의 수단으로 주어졌음을 우리는 잘 알고있다. 또한 이것들이 바로 이런 관점에서 가치를 갖는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 가치를 갖는다는것도 확실하다. 왜냐면 죽은 이들에게는 이 모든것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행복을 위해 주어진 것들이 오히려 인간을 불행으로 이끄는 일들을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고 그 심각성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는 현실도 수긍치 않을 수 없다.
압박이나 억압, 탐욕과 성의 상품화 내지 쾌락의 도구화라는 심각한 비인간화 현상 앞에 전율을 금할 수 없다. 봉사를 위해 주어진 권력이 압박으로 共有를 위해 주어진 재물들이 탐욕으로 독점되고 인간성숙과 인격완성을 위해 주어진 性이 쾌락의 도구로 전락되는 이 현실을 구원하고 해방하기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셨다.
당신 친히 아버지께 바치셨던 순종은 신앙에서만 나올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이다. 쥐꼬리 같은 영향력이나 권력을 자신을 위해 행사해 보고자하는 죄에 물론 인간 본성에 순종이란 새로운 가치를 내놓으시며 모든 권력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봉사하는데 그 참 가치가 있음을 보여 주셨다. 또한 당신은 모든 富를 한 몸에 지녀셨지만 적빈한 상태로 세상에 오셨고 가난이야 말로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한 절대적 가치임을 천명하셨다. 가난은 아무것도 갖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무엇을 갖되 갖는 방법을 아는것이 가난이다. 그래서 가진것에 집착하지 않고 또 그것을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잠시 있다가 지나갈 것임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형제적 사랑과 복음적 청빈 속에 가난하고 약한 이들과 함께 있는 교회되게 하소서』란 2백주년 기도문은 오늘의 교회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난은 필연적으로 형제적 사랑과 깊은 관련속에서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외면한 가난이 과연 아버지 안에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당신은 결코 물질적 가난을 원하신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빈곤은 죄악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도 가난을 선택하셨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누구나 내것 혹은 우리것 이라는데 대해 애착을 갖고있다. 그러나 복음적 가난은 형제애를 실천하기위한 필요조건이다.
또한 형제애의 참된 표지는 이웃을 위해 죽을 각오가, 그리고 모든 것을 나눌 각오가 되어있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인격을 서로 나누고 서로의 존엄성을 받아들이는데서 시작한다. 서로의 성숙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누구나가 갖는 결함과 부족을 보충함으로써 인간은 성장한다.
性은 곧 사랑의 가장 기묘한 표현이고 모든 것을 주고 받고싶어하는 나눔의 절정인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성의 나눔을 순결이라고 한다. 성의 가치가 전도되고 비인간화의 현상이 극을 치닫고있는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며 그리스도가 제시하신 순결의 새로운 가치를 생활화하도록 우리는 불림받고있다. 이 역시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큰 소명이라 하지않을 수 없다. 가정인이든 수도자이든 누구나가 순종과 가난의 삶을 살아야할 소명을 받고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교헌39)
이상의 복음적 권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땅히 살아가야만 할 가치일뿐 아니라 이것이 참된 가치임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가치들을 살아가는 정도만큼 靈의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순종이 비록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데서만 가능하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참된 자유가 어떤것인지 체험하게 될 것이다.
복음적 가난이 소유권의 포기와 아울러 참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아는데서 시작하므로 가난을 실천하는 만큼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참으로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인격과 더불어 육체 자체를 나누는 사람이 어찌 기쁨을 맛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유와 평화와 기쁨! 이것은 천국의 상태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행복은 어떤 사물이나 장소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어떤 상태로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특히 우리 인간에게 권력과 부와 성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함으로써 현세에서부터 천국의 영광을 맛보는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천국의 기쁨을 미리 살아가는 예언적 삶을 사는 이들이다. 이 삶은 곧 십자가의 삶이다.
2백주년을 위한 사업ㆍ행사ㆍ회의 이 모든것들이 다 필요하나 우리의 근본적 사고방식이나 생활이 쇄신되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제 모두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이 말씀하신 가치를 살아가야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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