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대준, 구상 형제와 우리형제(오기선, 오기순)의 넷은 집의 네기둥처럼 큰 일의 대들보들이 되자하여 소년 시절에 의형제를 맺었다. 집도 원산북쪽 덕원대신학교 바로 앞의 아래응골 동네 앞뒷집에 함께 살아, 서로서로가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세 형제는 남한에서 그런대로 제 나름대로의 기둥노릇을 하나 덕원신학교 교감으로 목자들을 기르던 내 아우 구대준 신부는 6ㆍ25를 앞두고 공산당원에게 끌려가 행방불명이 된지라 나는 그냥『내 아우는 순교자』라고 자위하며 살아간다.
이번에 그의 친동생인 구상의 도움으로 내 아우 구대준 신부의 면모를 밝힌다.
그는 능성 구씨로 대대로 벼슬길하던 높은 권좌의 후예였다. 그 조부는 울산부사로 계셨고 그 부친은 구한말 궁내부주사였는데, 순교자 집안의 후손이었던 구대준 신부의 자당과 결혼하면서 유교에서 개종하였다.
그 가운데서 1912년 태중교우로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14세에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형은 관동대지진때 행방불명이 된 채였고 동생 상준(具常)은 세상분간도 못하는 상태였으니 가족들의 반대로 큰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주의 섭리였기에 부친이 순사교습소 한문 문교관으로 있었다가 퇴직한 덕분으로 연금을 받게되어 그 돈으로 그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 부친은 수도원 교육사업을 돕는 해성학원을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필생의 심혈을 다바쳤다.
구대준 신부는 나폴레옹체구의 땅따름한 키에, 천재였다. 중ㆍ고ㆍ철학과 신학과에서 죽 톱으로 달렸다. 그런데도 늘 온유와 기쁨속에서 겸허한 태도로 남을 대했다. 참으로「모든이에게 모든 것이 된다」는 사도 바오로의 인생관을 달관했다. 큰 그릇의 완성되었기에 주는 그를 당신의 영원한 사제반열에 올리셨고 한국인으로 선 처음으로 덕원신학교 학감신부로 선발되는 영광을 받았어도 도대체 신학생인지 감독신부인지 식별하기 어려울만큼 평범한 인격을 갖췄던 그였다.
신부이면서도 양친에게 행하는 지극한 효성심은 그의 부친이 중풍으로 4년간 와병중이 셨을 때, 4년을 하루같이 매 주일 성체를 모시고와 고백성사를 주시고 영성체를 영하게 해 주신 것을 보면 안다. 그뿐인가? 변비가 심한 그의 부친의 항문에 손수 자기 손가락을 넣어 후벼내 드리는 효성심! 어찌다 과일, 과자가 들어오면 자기는 한 개도 손대지 않고 꼭 쌓아 두었다가 성체모시고 갈 때 그것을 풀어 친히 칼로 벗겨 드시도록한 그 효심은 오늘도 갸륵하기만 하다.
일제말엽의 사설학원 폐쇄령에도 불구하고 해성학원을 끝까지 끌고나간 그 반일정신, 민족정신은 안중근 의사의 투지를 이어받은듯 하였다. 그뿐인가! 사제관을 내놓고 거기다가 대건의원이란 병원을 차려 불우한 환자에게 거의 무료로 봉사하던 사랑의 정신은 마태오 복음 25장 35~40절과 같았다. 식모를 두지않고 회장집에 붙여 먹었던 그 불편도 웃음으로 소화해 나갔다. 사생활의 생계는 교구보조로 겨우 이어가고, 미사예물은 한푼도 손대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게 애긍했다.
2차대전 중 흥남에는 영국군 포로들이 수용되었었다. 해방이되자 그들 중 신자들이 성사보고, 미사드리러 성당엘 오가곤했고 구 신부도 그들 숙소로 찾아 가곤 했다. 그들 때문에 영어를 자습하여 성사까지 주게되었으니 그 당시 함경북도 내에서는 영어를 구사하는 이는 이 구 신부 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북한은 삽시간에 공산당천지가 되고 교회는 탄압속에서 다 폐쇄되었다. 회령과 계점본당 독일신부들이 금족령에 발이 묶이자 구 신부가 자진하여 양교회를 맡아 부임하였다.
그때 그 아우 상준이『형님 우리 같이 월남합시다』하고 누차 권유했어도『목자가 양을 버리고 어디를 가! 나 혼자 살라구? 그건 안돼! 너 혼자나 월남해라!』하는 대쪽 같은 그의 대답에 구상 아우도 고개를 푹 숙였다. 『저것봐라. 독일 신부들은 수억만리 타국 타향에 산설고 물설고 인심설고 말도 설은데도 저렇게 목자로서 죽어나가고 감금이 되는데 어떻게 날 월남하라는 거냐? 너는 우리 집안을 이어가야 되므로 어서 내려가라』하며 시치미를 뚝 떼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한가닥 목숨을 살리려 남하하는데도 구 신부만은 홀로 북상을 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그 뒤 국경부근 탄광지대에서 사목하다가 1947년 봄에 수녀원 피정강론차 원산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정체불명의 정치보위부에 납치되어 종무소식이 됐던 것이다. 그후 조사한 결과 평양감옥에서 독일신부 수사들과 같이 수감되었다가 6ㆍ25때 북괴군이 후퇴할 때 용산리 공동묘지 등너머 층층으로 논두렁같이 파놓은 곳에서 총살당한 줄로 안다. 그것은 필자가 구대준 신부를 찾으러 1950년 11월 평양에 가서 샅샅이 뒤지다가 알게 된 것이다.
그때 평양감옥 한 감방 안에 갇혔다가 민간인 포로석방 때 석방되어 왜관으로 오신 남호노라도 신부(前 왜관피정의집 지도신부, 지금은 노환으로 수도원에서 정양중)는 눈물로 떠듬 떠듬 말해준다.『구 가브리엘 대준 신부는 옥중에서도 아무런 원망없이 자기의 평화스러움을 끝내 유지했지요!』하면서 말 끝을 흐린다.
불현듯 그리워오는 내 아우 구대준 신부! 그가 흥남본당주임으로 재직시 형인 필자를 찾아 신의주에 왔을 때 함께 의주수문도 기어나가보고 김대건 신부님이 다섯차례나 건너오시던 압록강도 가로질러 가보기도 했었건마는… 이제 내 아우 구 신부는 지금 어디메 있나? 순교자로 내일의 성인들 1백3위 복자들하고 지나간 일들을 얘기하고 있으려니 하니, 내 맘이 좀 후련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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