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께 나헌티두 어무니가 있구먼유?』
『그려, 그런디 느이 어메두 난리 때 죽었어, 이것아!』
기섭은 웃을 듯 울 듯 이상한 표정을 지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리 속과 가슴 속에서 여전히 거세게 쿵쾅거리는 것만 느껴질 뿐, 어린 마음에도 한말로 허망하고 착잡하였다.
『느이 아베는 니가 커서 후제 높은 사람이 데어갖구서 나리 소리 듣는 게 소원이었는디…』
그러며 어른 머슴은 끌끌 혀를 찼다. 그러나 기섭은 냉큼 곧이 들리지가 않았다. 나리라는 게 뭘까?…그저 굉장히 높은 사람일거라는 아득한 생각이 들었고, 아무나 나리가 될 수 있는 게 아닐거라는 슬픈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아들이 커서 훗날 높은 사람이 되고 나리 소리 듣는게 소원이었던 아버지는 6ㆍ25사변 때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오 영감과 오 영감의 세살난 손자와 함께…
이미 벌써 수년전 일이 되었지만, 6ㆍ25사변이 일어난 해는 오 영감의 환갑이 되던 해였다. 오영감의 환갑일을 두 달쯤 앞두고 그 난리가 일어난 것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양반 지주인 데다가 일제 때도 부귀를 누리고 인정이 박함으로 해서 평판이 좋지 않았던 오 영감은 일찍 몸을 피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못하였고 멀리도 피신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그는 수십리 떨어진 어느 마름의 집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그 마름은 비교적 평판이 좋았던 사람이어서 오 영감을 잘 숨겨줄 수가 있었다. 오 영감은 그 마름의 집 나뭇간 솔가지 더미 속에서 수십일이나 꼼짝않고 기침도 하지않고 살았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환갑날을 맞았다. 그런데 그는 환갑날 아침에 세살난 어린 손자를 간절히 보고자 하였다. 단 하나 있는 손자였다. 그 손자만이라도 한번 환갑날 아침에 세살난 어린 손자를 보게 해달라고 그 전날 마름에게 간곡한 말을 일러 보냈다.
그날 새벽은 안개가 자욱하였다. 안개 때문에 하늘은 더욱 어두웠다. 그리고 그 안갯속에는 왠지 음산한 기운이며 한기 같은것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기섭은 새벽에 눈을 부비고 일어나서 닭잦추는 소리를 들으며, 아버지가 오 영감의 어린손자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뒷문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안개 덮인 새벽에 오 영감의 손자를 업고 뒷문으로 나가던 아버지의 모습…기섭의 기억에 남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때 재우치던 닭 울음소리에 싸여서 지금도 기섭의 눈에 선연히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그는 지금도 아버지의 그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면 그 때 새벽을 깨며 재우치던 닭 울음소리가 안겨 주던 이상한 긴박감 같은것이 다시금 두근두근 가슴에 서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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