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과 병오년에 치명하신 우리 순교자 79위는 피로써 주님을 증거하여 1925년에 복자가 되셨으나、오늘 소개하는 비안네 성인은 순교자가 아니면서 증거자로 같은 해에 성인이 되셨다. 당시 교황께서는 비안네 새성인을 모든 본당신부들의 대수호자로 정하시고 축일은 8월 4일로 정하셨다.
서울교구장 민주교님ㆍ대구교구장 안주교님등과 같이 우리 복자 시복식에 참석하고 그해 9월말에「로마」서 우리 신학교로 돌아오신 진베드로 교장신부님은 자기와 같은 고향사람으로 성인이 되신 분이라고 툭하면 성요한 비안네 신부님의 생애를 입버릇처럼 우리에게 열을 내어 강론하시곤 했다.
『너희도 신부가 되려면 비안네 같은 성인신부가 돼라』고 늘 타일러 주셔서 우리도 감명깊게 받아 들였다. 그래서 이 비안네성인의 생애를 더 정확하게 알기를 점찍고、방학중에 부여 금사리 성당에서 찌는 여름밤 창가에 앉아서 모기불 구수하게 타는 연기 냄새를 맡으며 이분의 생애를 읽고 또 읽었다. 잘 모르는 것은 이 마티아 여구본당 신부님과 식사중의 대화거리로 삼았다. 마침 금사리본당에는 이성당과 사제관을 세우신 공 유리아노 신부님이 논산으로 이사가실 때 그냥 놓고 가신「요한ㆍ마리아ㆍ비안네신부일대기」가 있어 이 책을 두루 두루 탐독하였다.
내내 큰 어려움이 앞을 잡고 가로막은 것은 어학이었다. 이불 속에서 도둑공부를 해서 겨우「하늘천」「따지」식으로 불어를 뜯어보는 주제에 이분의 일대기를 펴보니 흰것은 종이고 검은 것은 글자지 뭡니까! 다행히 불어-라띤어 사전과 라틴어-불어사전을 가져왔기에 그 사전들을 뒤져가며 밤을 꼬박 새는 수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요한ㆍ비안네신부는 1786년 5월 8일에「리용」에서 8km떨어진 인구 1천3백명 밖에 안되는「다르딜리에」농촌에서 태어났다. 유아 때부터 어머니의 신앙교육을 철저히 받아왔는데、한번은 어머니가 성모상을 비안네에게 선사하면서『꼭 이 어머님을 네 어머님으로 일생동안 잘 모셔라』하였다. 가난하고 무식한 부모지만 신심에는 부자였다. 비안네소년은 이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그 성모상을 늘 품에 안고 기도하고 농사도 짓고 공부도 했으며 또 언제나 꼭 품고 잤다.
한번은 부모를 도와 밭을 매게 되었단다. 어린 것이 가난해서 학교도 못가고 밭을 매는 신세가 어린맘에도 쓰라렸던지 제 심정을 어루만지기위해 어머니가 준 성모상에 먼저 키스하고『어머님 용서하세요. 이렇게라도해서 제 맘을 달래고、용기와 인내심을 기르렵니다』하고 멀리 멀리 성모상을 내던졌단다.
그리고나선『어서 어서 우리 성모님계신 데까지 빨리 가야지!』하고 땀을 뻘뻘흘려가며 부지런히 밭을 매어、성모상 떨어진 데까지 가선 무릎을 꿇고『성모어머님、죄송해요. 이렇게 밭고랑에 던져서、네! 용서하세요. 그래야 성모님도 저하고 함께 밭 매시는게 아닙니까? 그래야 저도 용기가 나고、인내력이 생겨난 답니다. 성모님! 저 하는짓이 우습지요! 그래도 저는 그렇게 해야 제 직성이 풀리지 뭡니까?』혼자 좋아라 웃어가며、또 성모상을 더 멀리 던지곤 부지런히 밭을 매었다니 그 얼마나 천진난만한 비안네소년입니까?
부지런하고 열심했지만 머리는 석두(石頭)였단다. 하나 배우면 둘 잊어 버리고、둘 가르쳐주면 넷은 잊어버리니 석두였지 뭡니까? 그래서 첫 고해도 11세에 겨우 하고 첫 영성체도 13세에 옆에서 도와줘서 간신히 할 수 있었다니 알아 보고도 남을일이 아닙니까!
17세 되던 해 큰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아버지! 전 신부가 될래요! 허락해 주십시요、네!』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겨우 한 말씀 드렸다. 가난에 쪼들린 아버지에게는 놀랄 노자였다. 학비를 댈 처지도 못되거니와 비안네머리가 돌머리라『무슨 공부가 들어간단 말이냐?』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진퇴양난이다. 그래도 더 부모님 맘을 상하지는 않게 하기위해 2년동안 열심히 농사일ㆍ양치는 일과 잡역들을 기구하며 기쁘게 해냈다. 성모님이 자기 갈길로 잘 인도해 주시리라 꼭 믿고…
신학교 가겠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어린 비안네에게 1백km가 넘는 성프란치스코 레지스의 묘소가 있는「라 루벤스」성지를 순례하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해발 1천m의 높은 산상에 있는 그 성지를 순례하되、돈 한 푼없이 가고 오는 도중 걸식할 것과 순전히 맨발로 걸어서 갈 것、거기다가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말고 오직 지팡이 하나와 묵주하나 걸치고 가라는 가혹한 명령이었다. 호통소리를 소나기 퍼붓듯 하면서『어서 다녀와! 어서 어서!』청천벼락이 쳤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의 앞길을 막으려는 그의 아버지의 계획이었다.
순례의 길을 떠났다. 길에서 바퀴벌레 하나도 자기를 순례자로 여겨주지 않았다. 공손하게 하룻밤 재워달라면 인정사정없이 추방하질않나、몽둥이로 구타하고 악담 욕설을 퍼붓고 위협 공갈까지 치질않나、이것이 이 동네 저 동네에 사는 인간들의 심보였다.
지치고 굶주리고 시달려 갈섶에 쓰러져 풀을 뜯어 먹고、옹달샘에서 줄줄 흐르는 찬물을 두 손으로 떠 먹었다. 엎어지고 고꾸라지며「라 루베스」성지에 도착했다.
1천km 산상을 기어올라가면서도『성모님、이 험한 길을 제가 기쁘게 걸어올라 가오리니 제게 신품성소를 주옵소서』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어린 비안네가 가엽지 않습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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