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기섭을 낳던 해부터 새경을 받지 않았었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기섭이 자라서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오 영감네서 집 한 채를 지어 주고 논밭 뙈기를 조금씩 떼어 주고、그리고 소작을 많이 붙여 주기로 오영감과 약속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기섭의 아버지가 자진해서 오영감과 그런 약속을 한데에는 아들을 낳아준 건너 마을의 그 애꾸눈이 과부와의 은밀한 약조가 터를 이루고 있었다. 일본으로 징용간 그녀의 남편이 그때 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함께 살림을 차려 살기로 굳게 언약을 한 것이었다. 해서 그런 특별한 요량으로 아버지는 더욱 열심히 머슴일을 하였고、오영감 집에 별스런 충성을 다 바쳤다.
그런 아버지는 그러나 기섭이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로 한 해를 1년 앞두고 일어난 난리통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그리고 기섭을 낳아 준 건너 마을의 그 애꾸눈이 과부도 인민군들에게 밥을 해준 것 때문에、하여튼 혼란통에 죽고 말았다.
『넌 참 억울허여. 억울허게 되었단말여. 학교이두 뭇가구、느이 아베가 육년 동안이나 쟁여놓은 새경두 하나 받어묵지 뭇 허구…』
그러며 어른 머슴은 또 혀를 끌끌찼다.
그러나 기섭은 별로 억울한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가 쟁여놓은 새경이 자기 것이 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그것 보다도 기섭에게 정작 억울한 일은 따로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는 아무일도 하지 않았고 열심히 놀기만 했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무엇을 시키거나 꾸중하거나 욕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은 후부터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힘겨운 일을 하기 시작하였고 이사람 저 사람에게서 지천과 욕지거리를 들어먹기 시작하였고、마님과 아씨로부터는 매를 맞기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고 억울하게만 느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나 매를 맞지 않고 사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저 다만 매를 맞지 않으려고 매사에 조심하고、열심히 일하고、시키는일은 무엇이든지 다 하였다.
기섭이 매일같이 맡아 하는일은 실로 여러가지였다. 실성했기 때문에 방 안에 갇혀서 방귀신처럼 살고 있는 서방님의 배설물을 때 맞춰 받아내는 일과 신상의 여러가지 구질구질한 일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서방님은 6ㆍ25사변이 일어나기 전에 서울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동란이 발생하자 남쪽으로 홀로 피난을 가 있다가 난리가 끝난후 집에 돌아와서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참혹하게 죽은 것을 알자 그만 실성을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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