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이란 해는 한국가톨릭교회로 봐서는 뜻있는 해가 아닐 수 없다. 교회가 외국신부들에 의해서 전래된것이 아니라 한국사람 스스로가 眞理의敎會를 영입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자부심을 갖고있다. 유교와 불교의 나라인 한국은 엄격하고 보수적이었다. 그 가운데 새로운 價値觀과 倫理觀으로 敎會는 대두되었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박해와 탄압이 뒤따랐고 絶對眞理로 자처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기존宗敎들의 排他的인 태도는 李朝가 끝났어도 여전했다.
日帝에 의한 탄압은 사제들을 스파이로까지 몰아 부쳤고 서양종교를 동양인이 왜 믿느냐고 무지한 소리로 신자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자유당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또 다른 형태로 탄압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가톨릭신자들이 공무원이 되고서는 떳떳하게 교우라는 것도 나타내지 못할 정도였다. 가톨릭 교회가 크고 작은 무수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굽힘없이 量的으로나 質的으로 발전해왔다. 그리고 맞이하는 2백주년이다. 한국교회로 봐서는 감회가 남달리 크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참으로 고난과 가시밭의 2백년이었고 슬픔과 고통의 2백년이었다. 그러기에 1백3位라는 聖人을 갖게 되었고 그것때문에 교황의 한국방문이라는 역사적으로 특기할 영광마저 누리게 된 것은 세계 만방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다른 어떤 외교적인 성과보다 더 크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부심을 갖고 2백주년을 기념하려 한다.
200주년 기념은 3백, 3천주년을 향한 발판이요 방향설정의 나침판 역할이 되기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200주년 기념을 준비하면서 몇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들이 있다.
지난 16일 정부의 모 각료가 공석에서 행한 연설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는 점이 첫째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흠잡아 써서『너희들이 하고있는 꼴이 무어냐? 이래 저래 해야 되지 않느냐? 예수 믿는것만이 제일이냐』하는 條로 나무라는 말이다. 이 말이 한 성직자의 발언이라면 모르되 그렇지가 않았다는 점에서 크게 반성해 봐야 할 것이다.
그 연설 내용의 잘잘못은 고사하고라도 신학적 전문 내용의 토착화문제ㆍ개인구원과 사회구원ㆍ국가와 종교문제 등을 神學者가 아닌 政治人의 입으로 단호하게 꾸지람을 들었다는 점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도대체 교회가 사회에 비친 모습이 어떠했기에 이렇게 당해야 하는가 하는 점들이다.
둘째, 200주년 기념을 준비하면서 많은 분들이 精神계몽을 앞세우고 기념을 왜 하는가 하는 根本問題을 매스콤을 통해 力說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것은 精神계몽이 덜 됐다는 것보다 기념 행사를 어떻게 하면 성대하게 잘끝낼까 하는 行事위주의 준비태도다. 200주년기념과 敎皇訪韓은 별개의 것이다. 200주년 紀念을 계기로 敎皇께서 오시는 것이지 敎皇께서 오시니 200주년기념을 하는 것이 아니다. 敎皇께서 오시지 못하시더라도 200주년 기념은 해야한다. 그렇다고 敎皇聖下께서 한국을 방문하시는 것이 못마땅하다거나 준비에 소홀해도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천만의 말씀이다. 歷史的 영광된 聖下訪問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않는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200주년 외부행사가 끝나면 마치 한국교회가 해야 할 모든 사명을 다한냥 하는 태도다. 어떻게 하든 200주년 기념행사만 무사히 끝나라 그러면 된다 라는 태도는 기념행사를 무엇때문에 하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세째, 200주년 기념행사가 3백년 4백년 천년을 향하는 디딤돌이 된다면 기념행사에 따르는 사목회의준비는 지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사목회의를 준비하는 모든 분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사목회의는 노고에 감사한다. 사목회의는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데만 그쳐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사목회의 초안「聖識者」에 관한 것인데 1장14항에『주교는 자기 지역뿐 아니라 항상 세계교회를 생각하며 교구간의 긴밀한 협조와 공동과제에 대하여 적극적 노력을 해야한다.
특히 어려운 중에 있는 교구를 보조하고 인사ㆍ재정 등의 협력에 있어 인색치 말아야한다.』또 15항에『주교들은 성직자양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성소계발과 신학교운영과 계속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도하고 감독하며 후원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비단 성직자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겠지만 이상의 예로 든 항들의 내용은 이미 제2차「바티칸」공의회문헌에 소상히 나와 있다. 이런 것들을 다시 인용해서 회의할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문제다. 원칙과 이론을 몰라서 새로 정립한다면 몰라도 이미 다 알고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사목회의의 내용은 보다 구체적인 면에 치중하는것이 더 옳지 않았겠느냐 하는 문제다. 가령 어려운 교구를 인사재정 등으로 도와주라 했으면 사제부족의 교구나 재정적으로 극히 빈약한 교구에 도움을 주는 회의여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말이다.
수많은 본당의 재정이 교구전체의 운영비보다 많은 본당이 있는가 하면 천명 내외의 신도수가 있는 본당에 보좌신부가 있는가 하면 3천명~4천명을 혼자 도맡아보는 본당도 있고 아예 신부가 없는 본당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떤 교구는 재정적으로 융성하고 어떤 교구는 빈약하고 어떤 교구는 신학교 졸업을 하고 3~4년이 지나도 보좌로 있고 어떤 교구에서는 신품을 받자 마자 본당주임신부로 임명하는 다급한 사정에 있다면 불균형이 아니겠는가.
『성직자의 양성은 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며 과제이다』라고 알고 있다면 신학교교수 수급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안을 회의에 상정해야 되지 않겠는가? 중요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고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어려움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렇게 발전한것도 선조들의 피의 대가이고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여러가지 어려운 점들을 들추어내서 우리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할것이고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과된 과제는 어떻게하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가슴속에 그리스도를 심어주느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심어주어야 할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내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에 맞추어야한다.
남을 도와줄때는 떡고물이 아니라 떡이어야하고 부자집개들이 주인식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 음식으로 연명하듯 하는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지금 집어먹을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가난한자에게 베풀어야 한다.
회의도 좋고 행사도 좋으나 지금 내 이웃의 가려운 곳을 찾아 긁어줄줄 아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 크리스찬이 되기위해서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말만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뜻있고 거룩한 200주년을 맞아 우리모두는 자기반성부터 해야 할 것이다. 자기가 처해있는 그 자리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답게 살 것인가를 알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84년은 우리모두가 화해와 일치의 정신으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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