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나 가자!』일어나 함께 나아가자! 촛불켜고 하얗게 밝힌 이 아침, 표호하는 외침이 누리를 뒤흔들고 있는것같다. 쟁쟁한 목소리가 가슴을 때리는것 같기도 하다. 누구인가? 누구의 채찍인가? 「한국 천주교회 2백주년 전국일치의 해」가 시작되는 장엄한 문은 가슴을 때리는 목소리와 더불어 조용히 열렸다. 어둡고 막막했던 시절, 한줄기 섬광처럼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2백살의 나이로 문을 여는 새 아침, 벅찬 기쁨을 가슴 깊숙한 곳으로만 채워가며 말없이 기도하는 공동체가 있다. 산산히 부수어지는 아픔속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나온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는 2백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신앙의 요람답게 묵묵한 자세로 새 아침을 맞아 우리의 마음을 적시고 있다.
첩첩산골 외딴 골짜기에서, 어느것하나 넉넉함 없는 외로운 삶속에서 풍부한 신앙을 유일한 유산으로 가꾸어온 공동체의 기름진 신앙은 축제의 열기가 이 땅을 물들이고 있는 오늘, 풍요함 속에서도 목말라하는 우리의 가슴을 무서운 채찍으로 때리고 있는 것같다. 『일어나 함께 가자』고.
1784년, 서울지방 수표교 부근에서 움튼 신앙의 싸앗은 1785년, 명례방대집회로 첫서리를 맞으면서 이 땅 전역으로 뿌려졌다.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 이룬 신자마을 신앙의 공동체는 오직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끈질긴 믿음으로, 변함없는 신앙을 키워 이 땅을 밝히는 신앙의 요람으로 자라났다.
새울공소(회장ㆍ김원희) 충북 진천읍 이월면 신계리, 그리 높지도 얕지도 않은 산세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우리신앙의 신초기지, 뿌리의 하나, 새울공소는 자리하고 있었다. 새시대(?)를 건설할 자연적인 조건도, 인위적인 조건도, 그 어느것하나 갖추고 있지못한 환경부터가 눈부신 발전을 유보시켜 온듯한「새울」의 마을은 2백년 신앙의 뿌리를 깊이 간직해온 신앙의 공동체답게 윤택치 못한 외형적인 여건과는 달리 매일 매일을 풍요한 신앙으로 보석처럼 살고있어 뜨거움을 느끼게 하고 있다.
서른 가구중 스물네 가구가 신앙 한명쯤은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이 마을의 미신자들은 미처 신앙을 갖지못했지만 죽을때 대세를 받게 해달라고 미리 부탁, 명실공히 1백%의미 신자가 대세를 받고 세상을 떠나고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신앙으로 묶일 수 밖에 없는 숙명같은 신앙의 힘이 이 마을을 지켜왔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진천읍에서 좁다란 산골길을 20분, 아니 30분여 달려 가면 숨겨져있는 듯한 마을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 관할본당이 있는 진천읍과는 불과 13km의 거리, 하얗게 이는 먼지를 뒤집어 쓰고 당도한 믿음의 공동체는 여느 마을과 다름없는 얌전한 모습으로 아침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풍족함을 느낄 수 없는 이 마을, 「새울공소」는 무지하고 또 끊임없이 이어지는 군난을 피해 이땅곳곳에 흩어져 뿌리내린 신앙의 씨앗, 그중의 하나로 오랜 세월에도 퇴락치않은 싱싱한 신앙의 모습을 간직하고 기자를 반겼다. 뜨거웠던 그날의 신앙이 그대로 살아 안으로 전해져 오는 풍요함속에 가슴이 놀라우리만치 더워져옴을 느꼈다.
사실, 시간과 여건이 허락치 않아 벼락같이 내려간 취재길은 성탄 판공으로 역시 바쁘기만한 현지 사정에 부딪치는 순간, 한없이 위축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천읍에서 가장 좋다는 호텔급 여관에서 보낸 초라한 하룻밤은 다음날 아침, 새울로 찾아들면서 말끔이 개일 수가 있었다.
갑자기 들어닥친 기자의 무례한 침입(?)을 어린이와도 같은 순박한 기쁨으로 맞이해준 이 마을 林海喆(바오로)할아버지. 83세라는 고령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만큼 생생한 기억으로 전해준 새울의 역사를 듣는 순간 기자는 2백년 역사의 현장으로 깊숙이 빨려들어갈 수가 있었다.
「새울공소」는 대부분의 유서깊은 공소가 그러하듯 정확한 시작 연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알수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할 만큼 새울의 시작은 군난시대로부터 비롯됐다고 유추만 하고있을 뿐이다. 1839년 기해박해와 1801년 신유박해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새울의 역사는 무수한 순교자를 배출해낸 진천지방 신앙의 요람이라 표현할 수 있다. 林옹의 기억에 남아있는 口傳 역사는 1839년 기해 박해이후 군난을 피해온 신자들이 사기골을 형성하면서 시작되고 있다. 현재 세군데에 형태가 남아있는 사기가마는 口傳의 역사를 충분히 뒷받침 해주고 있는 물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먼곳에서 흙을 파다가 이루었던 사기점은 1865년경 옹기점으로 전환했고 당시 이 마을의 옹기는 질이 좋다는 평판속에 호경기를 맞게된다. 가구수가 1백호에 달할만큼, 발전했던 새울 공소에는 당시 뮈뗄 민대주교가 견진성사를 주기위해 직접 방문할 만큼 놀라운 교세신장을 보이기도 했다고 임옹은 전하고 있다.
특히 새울은 최양업신부가 2년동안 거처하며 포교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동골, 배티지역과는 불과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따라서 일년중 장마철인 6월부터 8월까지 동골에 머물면서 집필과함께 진천지방10여개 교우촌을 돌보았던 최양업신부의 발길은 이곳까지 깊숙이 서려있다고 단언해 볼 수가 있다. 박해를 피해 산곡마을에서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가던 교우촌 신자들이 대부분 발각되면 당당히 순교대열에 나갔듯이 진천지방에도 기록에 남아있는 숫자로는 35명의 순교자가 참진리를 따라 목숨을 버렸다. 따라서 진천의 母공소로서 신앙을 파급시켜온 새울의 향기높은 신앙은 순교의 높은 덕을 바탕으로 이 지역을 지켜온 신앙의 보루라 말할 수가 있다.
1900년대 옹기점이 퇴각 하면서 번창했던 이 마을은 마을 부분 부분을 철거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겪게 된다. 골짜기 마다 동네를 형성했던 산곡의 면모는 옹기점의 퇴색과 더불어 급격히 왜소해져 산골 본래의 주업인 火田과 약간의 담배농사 만으로 생활을 꾸려갈 수 밖에 없었다. 아울러 1백여호를 자랑하면서 4백여명의 신앙 공동체가 윤택한 신앙을 계승시켜온 새울은 마을의 퇴락과 더불어 점차 쇠퇴, 신자수는 마을주민수가 줄어드는것과 정비례하여 급격히 줄어드는 아픔을 수년동안 겪어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마을 한가운데에 새마을사업의 유산인 함석지붕을 머리에 이고 조용히 서있는 공소건물은 20년이라는 짧은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마을의 성쇠와 더불어 세번이나 자리를 옮겨 앉을 수 밖에 없었던 기복심한 역사가 공소건물을 고이 간직할 수 없게 만들었던 주요인이었다. 물론 초기공동체가 한자리에 모여 조심스럽게 신앙을 다져온 공소건물이 마을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사기골에서 옹기골로, 다시 싸전으로 변천해온 와중에서 주민들의 이동이 무척이나 심했다는 점외에 기억을 이어 줄만한 이들이 이미 오래전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이 첫건물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잠작해 볼 뿐이다.
첫번째 공소건물에 이어 1900년대에 세워졌다고 여겨지는 두번째 건물도 수해로 허물어져 버린 후 「새울」은 공소건물을 가질 엄두조차 내지 못한채 오랫동안 옆마을 학교건물을 빌어 영세식과 큰첨례를 지내야만 했다. 모두가 하나같이 어려운 살림에 마음으로만 수십번씩 지었다 허물었던 공소건물은 1962년 안돈이라는 미국은인의 도움과 신자들의 금싸라기 같은 헌금 그리고 몸을 아끼지 않은 부역에 힘입어 현실로 나타났다. 직접 찍어만든 시멘트 블럭을 재료로한 20평 규모의 현재건물은 도시사람들이 보기엔 크게 초라해 보일 수도 있지만 한겨울 매운바람을 가려줌은 물론 드높았던 선조들의 신앙을 나누어 갖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성역으로 우뚝 서있다.
실제로「새울」공소는 기나긴 이지역의 믿음을 하나로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체의 역할을 충분히, 그리고 훌륭히 해내는 공공장소가 되고있다. 예절을 집행하는 성격외에 마을 공동체가 기쁨을 함께해 갑절이 되게하고 슬픔을 나누어 반감시키는 질박한 사랑의 전당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본산인 만큼 이「새울」은 김병철ㆍ김유철 형제신부를 비롯, 김원택신부가 한집 안에서 배출돼 사목활동에 임하고 있다. 순교자의 후손이 이룬 마을다운 알찬 결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진천읍과는 불과13km라는 지척에 위치하면서도「새울」공소마을은 급속히 변화하는 여타 산골마을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모든 성장이 정지되고 있어 커다란 안타까움이 되고 있다. 유행처럼 번지는 산업화의 물결, 현대화의 바람도 약간의 농토와 축산이 생활근거의 전부인 이곳의 실정을 크게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이처럼 넉넉치 못한 살림살이 때문에 배티성지 개발이 시작되자 현금으로 지원할 방도가 전혀 없었던 이들은 오로지 노동력으로 성지개발에 적극 동참했다.
선조들의 발길이 곳곳에 서려있고 뜨거운 믿음의 열기가 그대로 간직돼 있는 배티의 성역화를 결코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것이 이들의 공통된 마음이었다.
이 공동체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않으며 신앙을 간직하고 그 신앙을 이어준 선조들의 고귀한 믿음을 후대에 물려주는것이 바로 자신들에게 맏겨진 최대 임무라 굳게 믿고 있다.
따라서 모든것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는 그늘에서 제자리 걸음은 물론 퇴보를 거듭하는 생활여건의 안타까움 속에서도「새울」의 공동체는 결코 퇴색하지 않는 믿음으로 신앙인의 자세를 가꾸어왔다.
2백년을 이어온 유구한 신앙의 현장인 이 신앙 마을도 한국 천주교 2백주년과 교황성하의 방한, 103위 순교목자의 시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환난에 굴하지 않고 시련을 물리쳐 이기며 지켜온 이들의 신앙이 크게 달라질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빛의 자녀로, 2백년의 신앙은 결코 쇄신될 것도 강화될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한국천주교 2백주년이라는 새 역사의 장을 열면서 함께 맞이한 전국일치의 해-이 아침 신앙의 공동체가 풍기는 믿음의 행기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풍요한 신앙은 우리의 머리를 거듭 숙이게 하고 있다.
우리가 언제 이들의 기쁨을 나누었는가? 우리가 언제 이들의 고통을 함께 했는가?
이제 2백주년이 시작된 이 싯점에서 부터 본교회는 입을 모아 전국일치의 해를 외칠 것이 분명하다. 도ㆍ농간의 사랑 나눔도 역시 함께 외쳐질 것이다. 그리고 한해가 지나가면 그 외침도 따라서 사라져 갈것도 너무나 자명하다. 여기2백주년을 향해 달려나가기 전에 잠시 머물러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닌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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