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몹시 심약한 성품에다가 무슨 좋지 않은 내력이 겹쳐서 생긴 병인듯 실성기가 심해서 그는 그후로 쭉 방안에서만 사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배설물을 받아내는 일과 신상의 온갖 구질구질한 일이 다 기섭 차지인 것이었다. 그러나 기섭의 일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아침 저녁으로 여러개의 방과 마루들과 집 안팎을 청소하고 추울때는 방마다 군불을 지피는 일, 수시로 마님의 가래침 통과 재떨이를 비우고 아침마다 마님 방 아씨 방의 요강을 내다 가시는 일, 마님과 아씨의 다리를 주물러 주고 더울 떄는 부채질을 해주는 일, 그리고 마님과 아씨와 애기씨의 자질구레한 심부름 등이었다.
이렇게 도맡아 하는 고정된 일과만으로도 기섭은 매일같이 몸이 녹초가 될 정도로 고되었다. 어떤 때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리만치 바빴다. 하지만 그런 일들 말고도 때로는 어른 머슴이나 일꾼들을 도와 농사일을 거들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갖가지 천스럽고 고되고 바쁜 일들을 도맡아 꾀 부리지 않고 하면서도 기섭은 때때로 매를 맞고 하였다. 조금만 일을 잘못 하거나 실수를 해도 마님과 아씨에게서 간단한 꾸중이 아닌 불호령이 떨어졌고 여차하면 종아리에 회초리가 늘어붙고 하였다. 언젠가 한 번은 마님의 가래침 통과 재떨이를 비우려고 들고 나오다가 그만 잘못, 앉은 마님 가랑이에다 담뱃재를 폭삭 쏟은 일로 해서 노한 마님으로부터 종아리가 퍼렇게 멍이 들도록 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아씨의 다리를 주물러 주다가 새하얀 버선발에 누런 콧물을 떨어뜨린 실수로 또 한차례 쥐어박히고 혼이 났었다.
세상이 어떻고 시대가 어떻든 지금도 여전하게 옛날식 그대로 명칭과 호칭 따위를 고집하는 마님과 그리고 아씨는 여뭇 아랫것들을 엄하게 다스리는 인정 박한 양반 여인네들의 습속을 물려받은 축이었고, 그래서 매질을 가장 권위 있는 다스림의 유형으로 여기는가 보았다. 어쩌면 세상이 너무 변한 것을 서글퍼 하며 되우 퇴색해져 버린 양반의 위엄, 그 잔영을 어떻게든지 좀더 물고 늘어지려는 행투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난리가 일어나기 전 오 영감이 살아있을 적에는 마님과 아씨 모두 성깔이 그렇게 모질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난리가 나서 집안이 쑥밭이 되고부터는 둘다 심성이 표독해졌고 너그러움이나 웃음 따위를 잊어 버렸다. 주위 사람들을 공연히 미워하고 의심하는 버릇마저 생겼다. 그런 마님과 아씨는 기섭 아버지의 잘못으로 오영감과 어린 손자까지 죽고말았다는 기섭으로서는 알수없는 이유로 더욱 기섭을 미워하고 학대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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