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안네는 그후 60년지나 그때 그 성지순례의 쓰라림을 회고담으로 남겨놨다.
즉『죽는것은 구걸하는것보다 다 낫다. 난 一生에 단 한번 구걸해봤는데 그건 내가 성프란치스코ㆍ레지스묘지를 순례할 때, 아주 필설로 표시못할 곤궁에 빠졌지요. 나를 심지어 도둑놈으로 여겼고, 방도 숙소도 아무것도 아니줬지 뭡니까!』하고 말하고 또한『나는 라ㆍ루베스성지에 계시는 신부님을 할수없이 염치 불구하고 찾아갔지요. 그분이 나의 성지순례때 천주님께 한 약속을 다른것으로 바꾸어 주셨기에,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는 다시 이사람 저사람에게 창피스럽게 손을 내밀 필요가 엇ㅂ게 되었지 뭡니까?』하였다.
그 일생을 지켜본 아타나시오 수사는『그때부터 비안네는 어떤 일에든지 용기를 잃지않고 늘 앞으로의 전진만을 알고 살아갔다. 그 어려운 공부도 특히 라띤말까지도 쉬워진것 같았고, 주의 능력에 의지하면 이 세상에 불가능이 없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1807년에 비안네는 병역의무에 걸리게 되었다. 엎친데 덮치는 이 기구한 운명. 이제 신학교성소를 받느냐? 못받느냐?의 갈림길에 놓인 비안네는 고민아니할 수가 없었다. 병역의무를 실천하자니 성소가 울고 성소를 따르자니 병역의무가 운다.
그 때는 나폴레옹 1세가 대혁명을 일으켜,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하고 모든 신학교나 수도원을 폐쇄하면서 모든 수도자들을 추방해버리던 때였다. 그뿐인가? 자기가 성인이라고 자칭하면서「성나폴레옹축일」을 매년 8월 15일에 지내라고 전국에 영을 내렸지 뭡니까? 산자가 어떻게 성인이되며 그런 주제에 또 무슨 성인이랍니까? 날아가는 까마귀도 깍깍 울어대며 비웃을 지경이지요.
이 비인간적 행동을 그 당시 어느 학자는 아이로닉하게 풍자했다. 『천주교를 박해한 로마의 폭군황제 디오글레시아노 치하에, 그에게 순교당한 네아뽈리스 성인은 있어도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인은 없었으니 기절초풍할 노릇 다 있다』고 코웃음을 쳤으니 말입니다. 첩을 둔 그가 어떻게「聖 나폴레옹 1세 축일」을 제정했으냐 말입니다.
그에게 맞선 로마 교황 삐오 7세는 양심적으로 대항했다.
또다른 많은 이유로 나폴레옹을 거슬러 들고 일어나셨던 삐오 7세 교황! 그분은 나폴레옹이 로마를 침략하고 교회재산, 교황영토들을 몰수하자 그에게 파문을 선언했지 뭡니까! 그래서 나폴레옹은 교황을 체포해서「빠리」근교에 있는 자기별장에 감금했답니다.
필자는 1972년 8월 삐오 7세 교황이 감금되었던 그 궁전의 감방을 돌아보았는데 거기가 1811년 12월 9일에 우리 조선천주교회 창설 선조들의 주교신부를 달라는 탄원서를 받아들으시고 우셨던 곳이라 생각하니 그때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듯 내마음을 떨리게 했었다. 그래 자칭 성인이란 나폴레옹 1세가 교황 삐오 7세를 고문까지 했다니 고약한 성인도 다봤네!
성소문제 병역문제로 고민하던 비안네에게는 주의 사도가 되려는 뜻이 있었기에 그에게도 길이 트인것이다.「리용」지방관할 폐슈 추기경은 바로 이 나폴레옹의 숙부였다. 이 추기경을 봐서 나폴레옹은「황제법」을 발표하였다. 거기에는 비안네에게 성소의 길을 트는 항목이 있었다. 그래서 비안네는 한숨을 돌리고 두손모아 성모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참으로 이법은 그에게 큰 특전이 아닐수 없었다.
비안네는 이 모든 암운의 16개월후에 에킬리본당 바례이 신부님께로 다시 돌아갔다.
그때부터 아버지 같은 바례이 신부님 곁에서 공부를 계속 하게되자 그렇게 악을 쓰고 그의 성소를 반대하던 아버지가 수그러지고 고분고분해졌다.
바례이 신부님은 얼마나 고신극기, 편태, 대소재를 잘지켰던지 가죽하고 뼈만 남았다. 매일 건강을 위한 최저의 음식은 섭취해야 되는데도 그것마저 끊어 언제나 영양실조에 비틀거렸다. 그래도 극기에 소홀하지 않았다. 비안네도 바례이 신부님에게 극기하는 정신을 배워 이 세상 떠날때까지 늦추지않았다. 바례이 신부님은 비안네를 공부보다 신심생활에로 더 많이 지도해나갔다.
재주가 무재주인 비안네가 제일 꺼리는 것은 기억력이었다. 아는것 빼놓고는 다 모른다해도 엉망진창인데 가르쳐 주는것마다 곱하기로 누진식으로 잊어버리고 까먹으니 성소문제가 문제 아니될수 없었다. 양치고 감자심고 나무베고 콩심는데는 박사인데 공부라면 딱 질색이었다. 기억력이 모자라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821년말, 26세되던 해 아버지처럼 모시고 사사받던 바례이 신부님을 눈물로 작별하고 사제된다는 대망을 품고 몽부리송에 있는 베리엘소신학교에 입학했다. 떨리는 가슴을 안고 입학하고 보니 철학이 1년 신학이 2년인데 모든 학과가 다 라띤어로 시종일관하게 강의가 진행되었기에 가슴이 더욱 떨리고 불안하지 않을수 없었다.
신학강의는 무슨 소린지 짐작도 못하는 점점 검은 구름이 비안네 앞길에 첩첩으로 쌓이게 되었다.
그래도『틀림없이 너는 훌륭한 사제가 될것이다』라는 바례이 신부님의 말씀을 가슴에 굳게 새기고 전심전력을 다해 노력했다. 그러나 비안네의 시험답안지를 채점한 모든 교수신부들은 다 머리를 내흔들었다. 『다 틀렸다 다 틀렸어!』하고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