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노사의 세속 이름은 알 수가 없으며, 관찬사료(官撰史料)에 보이는「노사(老沙)」는 곧 그녀의 영세명인 「로사」를 지칭한 것이다. 교우들 사이에서는「감골댁」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1784년(정조8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본래 외교인인 부모에게는 성교의 도리를 알지 못하다가 남편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이를 듣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로사는 그 후 교우인 친척들과 함께 생활하였으므로 교리를 강습하고 경문을 배우게 되었다. 또한 세속의 생활에도 열심하여 의식에 구차함이 없이 모친과 동생들을 권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다.
언제나 진정한 통회를 발하여 성공함에 있어서도 부지런하고 성실하였다.
그 후 조선에 신부가 입국하자 예비를 타당히 하여 성사를 자주 받았으며 신부에 대한 정성이 또한 간절하여 음식을 지성으로 장만해서 드리곤 하였다.
김 로사의 열심은 날로 새롭게 되어갔다. 그러던 중 1838년 12월 2일에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권득인(權得仁) 베드로와 함께 그녀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이미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로 결심하고 있었으므로 높은 소리로「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를 뿐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이 동서와 함께 체포되었다고 한다.
포청에 압송된 후 천주교도인지를 확인하는 포장의 질문에 로사는『천주교를 믿사옵니다』라고 분명히 대답하였다. 이에 포장은 각종 형벌도구를 늘어놓고 위협하면서『네 몸에 혹독한 주뢰(周牢)와 주장(朱杖)을 가하기 전에 천주를 배반하고 너희 무리를 대라』고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녀는『매를 맞아 죽는 일이 있어도 주를 배반치 못할 뿐만 아니라 교우를 댈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공경하는 천주는 신인만물(新人萬物)의 대주이시며, 인간의 선악을 상벌하시어 선한자를 상주시고 악한자를 벌하시는 분이시니, 천주십계를 지키면 천당의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이요, 이를 어기면 지옥의 영원한 괴로움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배반할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을 해칠 수도 없습니다. 이상 더 강권하여도 쓸데없으니 저는 피를 흘려 이 진리를 증명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라 하여 교리를 설명하고 자신의 결심을 나타낼 뿐이었다.
혹형이 가하여지고 중형이 거듭 되었으나,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가 제일 우선이라는 그녀의 생각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에 포청에서는 그녀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형조로 이송하였다.
형관도 처음에는 그 결심을 꺾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문초하고 형벌을 가하였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그녀에게는 사형의 판결이 내려졌다.
옥에서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이미 체포되어 있던 여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이들과 함께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 56세었다.
김성임 마르타는 1787년(정조11년) 부평(富平)에서 태어나 살았으며 이에「부평댁」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아직 외교인이었을 때 그녀는 남편과의 불화로 인하여 서울로 숨어가서 점장이인 소경에게 재가하였다. 그런데 그 집이 본래 천주교를 알았던 때문에 여기에서 교리를 듣고 천주를 봉행하기 시작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에는 외교인들의 일을 돌보았으나 언제나 이를 애통히 여겨 의식을 구차히 하다가 곧 그 집을 떠나 신자들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였다.
그렇지만 혼자서 살아가야하는 어려움 때문에 그의 생활은 퍽이나 괴로웠고 어떤 때에는 신자들로부터 애긍을 받는 것으로 인하여 마음의 쓰림을 뼈저리게 느끼곤 하였다.
이러한 은혜를 갚기 위하여 여러가지로 신자들의 일을 거들어 주면서 열심히 생활하였다. 그러고 언제든지 온화한마음으로 주님께 깊이 감사하며 의탁하는 마음을 잃지 아니하였다.
기해년에 들어와 박해가 심하여지고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매임(李梅任) 데레사의 집에 기거하고 있던 마르타는 다른 여교우들과 함께 초청에 자수함으로써 신앙을 증거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4월 11일에 포졸들에게로 가서 묵주를 꺼내 보이면서 천주교도임을 밝히고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포청으로 압송되어서도 항상 같은 교우들임을 분명히 하였으며, 옥중에서의 고초와 배교를 강요하는 형벌에도 굽히지 아니하였다. 주뢰가 모두 다섯차례나 가해져 팔과 다리가 못쓰게 되었음에도 마르타 등은 『저희가 자수한 것은 천주를 증거하기 위함이니 어찌 천주를 배교하겠습니까』라고 진리에 대한 믿음을 나타낼 뿐이었다.
마침내 형조로 옮겨진 이 용감한 여교우들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하여 기해년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함께 참수 치명하니, 이때 마르타의 나이는 5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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