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여름방학 때 이 마티아 여구 신부와 필자는 무량사라는 절에 자전거로 하이킹을 갔다. 거기가서도 마티아 신부와 나는 비안네 성인의 얘기로 꽃을 피웠다. 무량사를 거닐며 우리 성자를 얘기하니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따지고 보면 불교와 우리 천주교는 대상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고 믿는 교리가 틀리지만 인간고행에는 사촌간이 아닌가!
이번 호에는 그때 이 마티아 신부와 필자가 비안네 신부의 극기와 속죄에 대해 얘기한 것을 중점적으로 써 나간다.
찾아오는 이 없이 적막하고 퇴락한 성당에 부임한 비안네 신부는 늘 사제관이 2층에 있는 것이 불만이었다. 거기다가 사제관은 성당보다 외양이 좀 더 나았다.
『내가 천주님보다 더 높은가? 2층에 살다니…왜 내가 천주님보다 더 잘 살아야 되나?』하고 사제관이 못마땅했다.
모두가 냉담자들인 마을주민들을 성당에 불러모아놓고 강론을 하는데 빼곡 빼곡 쓴 원고가 30에서 40페이지나 되었다니 강론을 듣다가 모두 다 나가버리질 않나… 어떤 때는 폐장을 찌르는 강론이 천지를 진동케 했단다. 하도 울화통이 터져서였겠지만.
비안네 신부의 극기와 속죄는 필설로 다 못하겠다. 그분은 하루 감자 세개로 살았다는데… 우리 사는 게 너무 두려웠다.
한번은 어린소녀 몇 명이 성당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얘들아! 우리 성모님께 묵주의 기도를 드리자!』하고 그들과 함께 냉담자들의 양심을 깨는 무기로 묵주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소녀들이 다 자기들의 집으로 갔는지도 모르고 밤이 다 지새도록 제대앞에 꿇어 엎드려 하나밖에 없는 자기영혼의 애타하는 속삭임을 하나밖에 없는 구세주 예수님의 감실만을 바라보며 맘을 다 짓짜가며 기도했다지 무언가! 이렇듯 기도하면서 밤에 잠은 별로라, 두 세시간 밖에 아니 잤다니 이 경험 없는 새 신부의 애틋함이 오죽 했으랴!
『향락을 무엇보다 좋아하던 한 처녀가 본당 신부님(비안네)과 묵주신공을 바치더니 회개했어요』하고 까타리나 라사늬 부인이 비안네 신부에게 일러주었을 때 신부는 말없이 감격의 눈물만 흘렸다.
아주 무식하지만 신심이 두터워져가는 농부 루도비꼬 샤팡종씨는 진심으로 회개하여, 들에 갔다가 돌아올 때면 꼭 성당문을 열어놓고 몇 시간이든지 감실만 바라보곤 하였다. 비안네 신부가 그것을 유심히 보다가 속으로 『입술은 가만히 있는데 왜 저렇게 오래 있나?』하고 혼잣말을 하고는 그에게 『무슨 기도를 그렇게 진지하게 합니까?』라고 물어니 그는『신부님! 저는 워낙이 눈이 발바닥이라서 책 볼 줄도 모르니… 그냥 감실 안에 계시는 내 사랑하는 예수님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겁니다. 그게 저에게는 천국에나 간 듯 맘이 흡족합니다요. 예수님도 절 바라다 보실겝니다』했다. 말없이 그 농부를 따뜻이 응시하는 비안네 신부에게 그는 다시『그 분이 저를 보옵시고 제가 그분을 바라보니 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입니까?』하며 자리를 뜰 생각도 않았다.
아르스촌의 냉담교우들을 극기와 속죄로 회개시키는 한편 그는 늘 주머니에 묵주를 여러 개 가지고 다니다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이에게 그것을 주면 그 묵주를 받은 이는 어김없이 얼마후에 회개했단다.
비안네 신부는 감자 두어개 다 떨어진 수단 빵꾸 난 속바지 고기는 이름도 모르고 사과 배 밀감 주스는 생긴 것도 모르면서 빵은 돌덩이 같이 되어 곰팡내가 나 썩더라도 입에 아니댔다니… 악마에게 『네가 지나 내가 지나 해 보자!』며 단단히 대결할 심산으로 극기와 속죄로 자신을 죽여, 악마의 손아귀에 꼭 쥐어진 영혼들을 쟁탈취하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으니 하느님께 바쳐진 그 충성된 마음앞에야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무량사의 그 많던 스님들도 대중을 구제하기 위해 많은 극기를 하셨겠지만 예수님을 중심으로 파고 드는 우리 비안네 신부의 그 줄기찬 극기·보속의 삶이 우리에게는 한없이 부러운 게 아니겠는가? 그래도 비안네 신부 자신은 거의 강박관념에 싸였단다. 『나는 지옥엘 가지? 내 발밑에는 지옥이 있는데 내가 그리로 떨어지지? 필경?』일생을 두고 이 두려움 속에 전전긍긍했단다.
침대에 깐 매트리스는 몰래 가난한 이에게 주어버리고, 큰 광목 자루 속에 짚을 넣고 꿰매 그 위에서 자다가, 그 짚요도 뜯어 그 속에 든 짚을 한 웅큼씩 난로에 넣어 태워버리기에 일생토록 몸 한쪽이 마비 경련을 일으키고 얼굴도 마비가 되어 경련을 일으켰다. 성자는 이런 속에서 나는게 원칙인가 한다.
우리 비안네 신부와 스님들의 생활에 있어 같은 점이 많은데 그 포인트만 다른 게 아닐까고 그때 이여구 신부와 필자는 생각했었다. 무량사를 거닐었을때가 지금으로부터 어느덧 54년전, 그때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제 잘 둥지를 찾아가는 까막까치와 함께 우리도 잘 곳을 찾아 신나게 자전거페달을 밟았던 날이 그립구나!(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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