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자들은 “현대의 산업사회는 과학과 기술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오만과 허상에 빠져 있다. 오늘날의 생태문제의 핵심은 모든 개인과 집단의 행동 그리고 국가의 정책이 무엇보다 경제 논리에 근거해 인간의 탐욕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주제발표 요약.
- 생태신학적 관점에서 본 토라의 땅 (최승정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서울 홍은3동본당 주임)
‘땅’은 돌보아야 할 생명의 근본
▲ 최승정 신부
생태적 관심은 신과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질문, 즉 신은 누구이고 세상은 무엇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근원적 성찰에서 출발해야 한다. 기존의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노력과 함께 요청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기술문명과 물질문명을 통해 인간이 궁극적 행복과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현대판 뱀의 유혹과 대결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돌보기를 원하셨던 하늘과 땅을 향한 우리들의 경외감과 친밀감을 통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그리고 노아의 이야기에 계속 등장하는 죄의 본질은 폭력이다(창세 6,11.13). 수많은 생태전문가와 환경운동가들이 반복해서 지적하듯이 생태적 문제들은 인간과 자연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생태적 관점에서 묵상해볼 수 있는 좋은 텍스트는 루카 10,25-28의 말씀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계층과 민족과 국가와 인종을 가르기보다는 자신을 요청하는 모든 이의 이웃이 되라고 명령하신다. 오늘날 우리는 이 명령을 시대의 징표를 깨우치며 좀 더 폭넓은 생태적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의 돌봄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많은 생명을 지닌 것들과 그들에게 생명을 선사하는 땅은 이제 생태신학의 첫 발자국을 통해 우리의 이웃이고 형제자매이고 어머니가 된다.
- 창조와 새 창조(생태신학적 그리스도론의 시도) (백운철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창조와 새 창조의 중심 그리스도
▲ 백운철 신부
창세기 1,29-30에 나타나고 있는 초식성의 삶은 사람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들을 지배하라는 소명에 근본적인 제한을 가한다. 창세기가 말하는 동물에 대한 지배는 폭력적인 수성을 풀의 연약함으로 무마시키는 부드러운 지배를 의미한다. 하느님은 노아와 그의 모든 후손들을 포함하여 모든 생물들과 함께 무지개를 표지로 영원한 계약을 맺으셨다(창세 9,9-17). 이후 노아의 계약에 담긴 생태학적인 전망은 모세의 율법 안에 계승되고 더욱 확장됐다. 바로 하느님 인간 자연을 포괄하는 3대 율법이자 성경적 생태제도인 안식일, 안식년, 희년법을 통해서다. 이 제도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피조계 전체의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전일적이고 유기적인 생명 공동체를 지향한다. 안식일 제도가 인간과 동물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안식년이 휴경을 통해 땅의 회복을 중심 목표로 한다면, 희년은 그 회복을 통해 이스라엘의 지파와 문중의 재건을 그 주요 과제로 삼는다.
성경은 창조와 새 창조가 교차하는 시점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 뜻에 따라 동료 인간과 자연을 만나야 하는지를 거대한 서사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가 있다. 그리스도는 창조와 새 창조의 중심에서 시작이요 마침으로 역사한다. 사람의 아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섬기는 방식은 창세기 1,29이 지향하는 부드러운 지배의 놀라운 실현이며, 이는 오늘까지도 성찬례를 통해 기억되고 또 선포된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구체성과 그 종착점은 결국 몸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창조의 기점도 몸이고 구원의 성취도 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 주는 그 구체적인 생명의식과 유기적인 연대의식을 단지 인간 공동체에서뿐 아니라 자연과 이웃 생명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며 살아가도록 소명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하느님이 함께 만나는 자리다. 예나 지금이나 피조물은 허무의 지배 아래 탄식하며 고통을 겪으면서도(로마 8,22) 성령의 새로운 창조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듭나 장차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1코린 15,28)이 되는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