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임했을 때 수원교구는 경제적으로 힘이 아주 약했다. 더구나 2000만 원의 빚까지 짊어져야 했는데, 그때 나는 아무런 걱정도 안 했다. 그 점이 참 이상하기도 하다. 돈이 없는데도 돈 걱정을 안 하고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축복이므로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 돈은 필요했다. 나는 이 가난한 교구를 좀 살려야 되겠다 싶어서 미국, 유럽 등 사방으로 뛰어다니면서 강론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여 돈을 좀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 주교 생활은 구걸 행각이었다. 거지주교인 덕분에 여행은 참 많이 했지만 말이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가난한 나라, 가난한 교구 주교들은 누구나 구걸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 주교능력은 구걸능력에 달렸다고 할 정도였다.
1988년 수원교구 설정 25주년 행사로 수원 공설운동장에서 신앙대회를 했는데, 그때 내가 이제는 더 이상 돈 얻으러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지금까지는 구걸을 해서 성당도 짓고 신학교도 짓고 했지만 이제부터 구걸 행각은 안 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외국으로 간다하면 여러 신부님들과 교우분들이 오히려 나한테 돈을 갖다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보다 더 가난한 나라의 주교들을 만나서 주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도움을 받고 살았지만 이제는 갚아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주교님들을 만나면 누가 가난한지 얼굴만 보면 알 수 있다. 5000불을 갖고 인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주교님들에게 500불씩 주면 열 군데나 줄 수 있었다. 내가 은퇴하기 직전 교황청에서 정규적으로 오는 원조까지 일절 다 거절했다. 먼저 교황대사님한테 의논했더니 취소하면 교황청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포교성성에 정규적인 원조를 취소하는 편지를 썼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로마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남을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이 됐으니 우리한테 주는 원조를 아프리카나 다른 가난한 다른 나라로 돌려주십시오.”
마침내 수원교구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자립했을 뿐 아니라 이제 어려움에 처해 있는 다른 나라들을 도와주는 교회로 성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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