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적으로는 끝에서 두 번째 주일인 오늘, 교회는 성서말씀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주님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세말(世末)을 향하도록 이끌어준다. 마침, 요즈음, 거리에 날리고 있는 낙엽들과, 며칠 사이에 앙상한 가지들만 내놓고 서있는 나무들은, 우리의 생명까지 포함하여 세상만사에는 언젠가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 당시에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묵시문학적 방법으로 「세말」이 묘사되어 있다. 묵시(默示)문학이란 기원전 2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경 사이에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서 널리 퍼져있던 사고방식 또는 표현방식을 총괄하여 가리키는 개념이다(대표적 작품은 다니엘서와 요한 묵시록). 많은 사람들에게 묵시 또는 계시(apocalypsis)라는 단어는 즉시 무시무시한 세상 종말의 재앙을 연상시키는 단어가 되어 버렸으나, 성서의 묵시문학의 원래의 목적은 독자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위로와 희망」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묵시문학은 위기의 시대에 생겨난 문학이었다. 악의 세력을 심판하여 없애시고 의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열어 보임으로써 위기에 처해있던 의인들에게 『의로와 희망을 북돋아 주는 것』이 묵시문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그리고 미래의 일어날 일들의 정확한 순서를 알리고 전하는 것이 원래의 목표는 아니었다.
묵시문학적 작품들을 해석할 때에는 이러한 문학적 특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몇 해 전에 우리 나라 사회까지도 시끄럽게 했던 「휴거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에서처럼, 묵시문학의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사람들에게 공포감만 자아내고, 그렇지 않아도 세상에 지치고 지친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종교의 이름으로 새로운 멍에와 공포감만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는 큰 재난이 닥친다는 말과, 해, 달 별 등 천체의 변화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묵시문학의 대표적인 특성 중의 하나였다. 세말의 때에 『사람의 아들(人子)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떮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다니엘서 7,13~14를 배경으로 하여 볼 때 더 잘 이해가 된다. 그렇게 이해해보면, 人子가 구름에 싸여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는 모든 권세들에 대한 최종심판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통치권이 세워짐을 의미한다. 악한 권세들에게는 멸망을 의미하고, 그분을 기다리는 의인들(오늘복음에는「선민들」)게는 구원을 의미한다.
많은 위경들의 묵시문학 작품들과 비교하여, 신약성서에 수록되어 있는 묵시문학적 문헌들은 세말의 시점과 장소 및 정확한 순서들과 같이 호기심 차원에서 제기되는 질문제기에 대하여는 답을 잘 주지 않으면서 그러한 태도 자체에 거리를 두려고 하는 면을 보여 준다. 그래서 세말에 대하여 호기심 어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제일먼저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메시아라고 자처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그리고 세말이 언제 올지 그 날과 그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깨어 기다리라』는 분부가 예수님의 세말에 관한 가르침의 핵심 중의 하나였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도 『깨어 기다리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의 통치가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날과 그 시간은 하느님 외에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표징이 주어질터이니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처럼 공포에 질려 허둥대지 말고, 표징을 읽을 수 있도록 『깨어 기다리라』는 취지의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깨어 기다리는 삶』인가? 세말을 올바로 준비하는 삶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최고계명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에 이미 나타나 있다고 생각된다. 하느님께 대한 한결같이 충직한 사랑의 마음에서, 이웃 형제 자매들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베풀며 사는 삶이야말로 세말(종말)을 올바로 준비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갑작스럽게 어떤 특정 기도를 바쳐야한다거나 또는 새롭게 어떤 특정 단체에 반드시 소솓외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심을 굳게 간직하고 꾸준히 사랑을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는 두려워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공놀이를 계속 하겠다』고 말했다는 어느 성인의 정신대로 말이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분명히 「세말」이 예기치 못한 때에 전 세계적으로 갑자기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자연 과학적 세계상에 젖어 사는 우리 현대인들은 「세말」이 갑작스럽게 올 수 있다는 복음서의 이 메시지에 매우 둔감하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자연과학적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이 자연과학적 법칙성을 벗어나는 어떤 우주적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에게, 「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오만하고 헛된 안전감을 떨쳐내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라고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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