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교구 이종흥(그리산도) 몬시뇰이 11월 21일 사제수품 50주년 금경축을 맞았다.
이종흥 몬시뇰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3·4대 사무총장과 대구대교구 사무처장·총대리 등을 역임하면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교회 행정체계 정비에 헌신했다. 10년 넘게 외국에서 공부하고, 10년 정도는 대구선목신학대학 초대학장과 선목학원 이사장 등으로 교육사업에 투신했으며, 나머지 10년 정도를 본당에서 사목했다. 대부분 신부들이 본당사목을 중심으로 잠깐씩 교구청 근무나 특수사목에 임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무척 특이한 경력이다.
그래서일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묻자 「한국교회 사목문서 통일」이라고 말했다.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 「뭐했냐?」고 물으시면 「이런 것 좀 했습니다」라고는 말할 수 있겠지』라며 시작되는 사목문서 통일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위스와 프랑스에서 12년 가까이 공부하고 69년 귀국하니 교구 사무국장(지금의 사무처장)이라는 소임이 떨어졌다. 이때까지만해도 사목문서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던지 어느 것 하나 통일된게 없었고 본당마다 교구마다 다 달랐다. 교적이나 성사 문서는 신자관리에 있어 절대적이며 중추적인 문서임에도 양식이 통일 되지 않았고, 철저한 보존이 이뤄지지 않았다. 혼인문서는 낱장으로 돌아다녔고 조금 지난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대구만 통일하면 뭐하나 하는 생각에 전국 교구를 왔다갔다하며 뜻을 모았다. 그러나 모두들 필요성은 공감하면서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혼자서 자를 대고 선을 그으면서 하나 하나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선 성사문서부터 통일시켜나가던 차에 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을 맡게되고 진도는 잠시 멈췄다. 81년 이후 다시 대구로 내려와 교구 일을 보면서 2차 통일 작업에 돌입, 모든 양식을 재구성했다.
총대리회의와 주교회의를 거쳐 90년부터 통일된 사목문서를 전국에 보급했다. 「사목지침서 해설」699쪽부터 769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분담할 사람도,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도 없이 20년에 걸쳐 혼자서 다 하다시피 해온 일이었다. 힘들지만 보람있는 일이었다.
또하나 이몬시뇰이 노력을 기울인 일 중의 하나는 「개방적인 주교회의」를 만드는 것이었다. 주교회의가 주교들만이 모여 비밀회의를 갖고 결과만 발표함으로써 전체 교회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사무총장 재임시 규약들은 조금씩 개정하면서 전문위원을 대동시키고, 옵저버제도 오입을 통해 누구든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등 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시대상황의 혼란과 주교들의 무관심 등으로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지금도 큰 변화가 없어 아쉬울 뿐이다.
96년 은퇴 후 기도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몬시뇰은 시국과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남북화해 무드가 반갑기도 하지만 굳어진 북한의 체제가 우려된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에 대한 시련이 단결 못하는 국민성과 사회가 저지른 죄 때문이라고 보는 몬시뇰은 이 사회 나아가 교회의 도덕 윤리 타락에 일침을 가한다.
『하느님 앞에 깨끗한 양심이 몇이나 있겠나. 신자들까지 세상 조류에 휩쓸려 냉담은 물론 낙태도 쉽게 저지르는 세상이니, 파공도 없어졋잖아. 교육이 너무 부족해』
내년이면 만 80세다. 한평생 취미 하나없이 교회 일에 헌신해온 몬시뇰은 기도 속에서 사회와 교회를 위해 마지막 소명을 불태우고 있다. 금경축 소감을 묻자 『세월이 빠르다. 사제품을 받은게 엊그제 같은데 실감이 안난다. 세월따라 나이를 먹는 것, 순명하고 가야할 준비나 잘해야지』라고 말했다.
이종흥 몬시뇰의 사제수품 금경축 미사<사진>는 11월 21일 오전 10시30분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봉헌됐다. 미사에는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와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를 비롯 교구 사제단 수도자 평신도들이 참석, 금경축을 축하하고 기쁨을 나누었다.
이종흥 몬시뇰은 1950년 11월 2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고 이천, 평강본당 보좌로 사목일선에 나섰다. 이후 강원도 신림본당 주임, 부산 중앙본당과 대구 계산본당 보좌를 거쳐 대구 삼덕·대덕·계산본당 주임을 역임했다.
대구 효성초등학교 교장과 서울 성신교고(소신학교) 교사를 거쳐 57년부터 69년까지 스위스와 프랑스에서 공부한 이종흥 몬시뇰은 이후 대구 선목신학대학 초대학장, 학교법인 선목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이종흥 몬시뇰은 대구대교구 사무(상서)국장을 지낸 뒤 73년부터 8년가까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교회 행정체계 정비에 크게 이바지 했다. 이후 대구대교구 사무처장과 총대리를 거쳐 계산동 주교좌본당 주임을 끝으로 96년 8월 30일 은퇴했으며 이에앞서 91년 3월 1일 몬시뇰에 서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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