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6년 병오박해 당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9위의 순교자들의 죽음이 잊혀져갈 때쯤, 또 하나의 피비린내나는 박해가 터졌다.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이들이 순교했다는 1866년 병인박해다.
이 가운데 남종삼(요한) 성인은 조선 후기의 남인계 학자로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서양과의 교류를 주장하다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38년(헌종 4년), 22세에 문과에 급제해 철종 때 승지에 올랐으며, 고종 초에는 학덕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교육을 담당하기도 한 능력있는 학자다.
그는 큰아버지인 남상교의 양자로 들어가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의 관직 때문에 입교한 후에도 교회활동을 드러나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던 그가 1861년 입국한 리델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고, 이전부터 베르뇌와 다블뤼 주교 등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고종 초 러시아인들이 조선 국경을 넘나들면서부터다. 1865년 말 그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막다)의 방아책’을 최초로 대원군에게 건의한 홍봉주 등과 뜻을 같이해 다시 방아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열강과 조선이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고 더불어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위기감을 느낀 대원군은 남종삼에게 낙향을 권유하고, 남종삼은 신앙을 위해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제천 땅 묘재에 은거해 있는 부친 남상교를 찾아간다. 부친의 격려를 받은 남종삼은 순교를 각오하고 다시 상경하기로 작정한 다음 배론의 신학당을 찾아 고해성사를 받고 서울로 향했다.
자신의 정치적 문제를 천주교 박해로 풀어보려는 생각을 가진 대원군은 1866년 서양선교사들에 대한 사형선고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선포하고, 같은 해 3월 1일 서울 근처의 고양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남종삼을 체포한다.
국청에서 남종삼은 6번의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갔으며, 천주교가 정도라는 ‘호교론’을 펼쳐나갔다.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마음 속 신앙이 만천하에 고백되는 순간이었다. 가톨릭대사전은 그가 서양과의 교류를 대원군에게 건의한 것은 매국의 계책이 아니라 충성하는 마음과 애국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전한다.
또 부친과 서양 선교사들, 동료 신자들도 남종삼의 이 같은 생각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과 교류하며 그는 세계정세와 앞으로의 방향을 살폈고, 자신의 신앙과 안목에 접합해 서양과의 교류를 건의한 것으로 비쳐진다.
결국 그는 모반부도라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선고받고,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동료인 홍봉주와 함께 순교했다. 이후 1909년 용산 왜고개에 매장된 그의 시신을 명동성당에 안치했으며, 시복을 계기로 다시 절두산 지하성당으로 옮겨 안치했다. 남종삼은 1885년 조정의 조치로 모반부도의 죄를 벗었으며,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시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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