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애덕은 애긍시사를 포함한다.
애긍시사는 애긍(哀矜, 불쌍히 여김)과 시사(施捨)라 할때, 사(捨)는 놓을 사, 버릴 사도 되지만, 베풀 사도 된다. 따라서 시사한다는 말은 자의적(字義的)으로는 「베풀고 베푼다」는 말이다.
요한 1서는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1요한 3,17~18)하였다.
또 최후의 심판을 말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불쌍한 사람에게 애덕을 실천하거나 실천하지 않은 것이 주님께 대해서 애덕을 실천하거나 실천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시겠다고 언명하셨다.
물질을 이용하여 애덕을 베푸는 데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형편에 상응하는 몇가지 기준을 전제로 하고 실천 방안을 논할 것이다.
1) 본인의 생존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을 가지고 타인에게 시사할 의무는 없다. 아무도 자기 생존을 희생하여 타인을 도와줄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에서 막시밀리안 꼴베 성인이 다른 포로들 대신에 처형을 자원한 것은 영웅적인 애덕행위로 경탄하는 바이지만,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의무로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평균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재산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도와줄 의무가 있고, 타인의 보통 생활을 도와준다면 좋은 애덕행위를 한 것이다.
3) 평균적인 생활을 유지하고도 남을 만한 재산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생존에 요구되는 것을 시사할 중대한 의무가 있고 사회나 타인의 보통 필요에 기여할 보통 정도의 의무가 있다.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시오… 있는 것을 남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라고 하시오』(1디모 6,17~18).
4) 그러나 거리에서 만나는 구걸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병자기거나 일하기 어려운 장애인이 아닌 경우에는 우리가 그의 필요의 정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만날 때부터 애긍시사를 할 의무는 없다. 그것보다는 전문적으로 불우한 이웃을 돕는 기관이나 단체를 돕는 것이 더 현명한 애덕실천이 된다.
근본적으로 세상의 재화(財貨)는 조물주께서 인류의 필요를 위하여 인류에게 맡기신 것이므로 비록 재화의 효과적 관리를 위하여 국법이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있을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인간은 재물의 절대적 소유권자가 아니고 관리권자에 불과하니 소유권자인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관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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