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릉 부르릉」숨가쁜 엔진소음을 쏟아내며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는 마을버스. 십분쯤 올랐을까. 시멘트 벽돌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 채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자그마한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있다. 언덕 길을 오르기 전 보았던 아파트 단지나, 양옥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부산 도심의 황령산 한자락 연산동 골짜기에 자리잡은 물만골. 5~6년 전만 해도 택시조차 올라오길 거부한 곳이다.
물이 많이 솟아나는 곳이라 해서 물만골로 불리는 이곳에는 30여년 전부터 농촌지역 이주민, 개발에 밀려난 철거민 등이 모여살기 시작했다. 지금도 대부분의 주민들은 일용직, 가내수공업, 노점상 등으로 어렵사리 살림을 꾸려나간다. 10여년째 무허가 주택 철거반원에 맞서 싸우고 있다.
하지만 물만골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안다. 이곳엔 담이 없다. 마을 회관 벽에는 「더불어 함께 사는 새날 공동체, 물만골 공동체」라고 쓰인 글귀가 눈길을 끈다. 주민들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물만골 공동체는 2년 전부터 조합형태의 자활경제공동체기획단을 발족하고 일용직 등의 일감을 나눈다. 노인들은 재활용쓰레기를 수거, 판매한다. 한 가구당 조금씩 성금을 모아 땅도 사기 시작했다. 올해까지 5500여평을 사들였다. 마을부지 8만여평을 모두 사들여 도심의 난개발이 침입하지 않게 막고, 맑은 물을 보호하고, 마을 주위의 환경을 그대로 살린 생태마을 건설이 이들의 꿈이다.
어른들의 온 희망을 한몸에 담은 아이들.
흔히 청소년우범지역으로 낙인찍히기 일쑤인 달동네지만 문제 청소년은 없다. 가출한 엄마,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덕분에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다라는 아이들도 어두운 구석을 찾아볼 수 없다. 덜컹대는 버스에서 내린 기자를 맨 처음 반겨준 건 6살배기 아이의 밝은 미소와 손짓이었다. 어른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골목길, 산기슭을 따라 지어진 집 덕분에 곳곳에 낭떠러지가 숨어있는 가파른 길을 날듯이 뛰어간 아이가 도착한 곳은 물만골 놀이방, 물만골 공부방. 이곳이 아이들 얼굴에 환하게 피어난 미소의 근원지였다.
대부분 맞벌이 부모, 이혼, 어려운 살림, 낮은 교육수준…. 이로 인한 끊임없는 싸움소리, 알코올 중독 등은 청소년, 어린이들을 망가뜨렸다.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음주, 흡연도 예싸였다. 툭하면 본드를 흡입하거나 가출했다. 게다가 아랫마을 아이들이 잘입고 잘먹고 각종 학원엘 다니는 모습과 자꾸 비교하면서 어린 가슴에도 하이 맺히고, 비뚤어진 오기만 솟았다. 94년 1월 문을 연 물만골 공부방은 이런 아이들에게 밝은 등대가 됐다.
공부방은 아이들의 삶의 목표를 돈이 아닌, 대학이 아닌 「사람답게 사는 것」으로 바꿨다. 출세나 돈으로 가려진 껍데기 삶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꿈꾸는 텃밭이 됐다.
초·중·고 40여명의 학생들은 매일 공부방에서 이모·삼촌으로 불리는 26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과외수업을 한다. 특별활동도 다양하다. 수화반, 만화반, 풍물패, 바둑반 등등. 올해는 개설되지 않았지만 노래부르기반, 대늣반 등도 인기다. 계절에 따라 야외캠프, 산행, 야유회, 체험자연합습 등이 이어진다. 지난 봄엔 을숙도로 환경캠프를 다녀왔다. 올 겨울방학 때도 비디오 교실, 스키캠프 등이 예정돼 있다. 날마다 물만골을 언제 떠나는지 묻고, 아파트로 이사가자며 부모를 졸라대던 인혜(가명·15)도 이젠 불평하지 않는다. 처음엔 『공부방이 아니라 학생들 연애방이 아니냐, 문제아들과 함께 모여 무슨 공부를 하겠느냐』며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던 마을 어른들도 공부방을 자랑스러워한다.
공부방의 방훈은 「꽃들아, 네 맘대로 피어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들은 이제 꿈을 가진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한다. 고등학생들과 공부방 졸업생들은 매달 근처 어린이집 등 사회복지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펼친다. 북한어린이돕기, 알뜰장터도 마련한다. 받은 것을 되돌려줄 줄 아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공부방의 활동은 밝은 마을 분위기 조성에도 한몫했다. 학부모 교육을 병행함으로써 생각의 변화를 함께 했다. 명절이나 경로잔치 등의 마을행사에는 평소 가고닦은 노래, 춤 실력을 발휘해 즐거운 시간을 마련한다.
이 모든 것은 지난 93년 자발적으로 물만골을 찾아 공부방을 마련한 조성제 신부를 비롯한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노력으로 일궈졌다. 그러나 조신부와 26명의 선생님들은 정작 자신들이 학생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훨씬 많다며 수고를 부인한다.
『처음엔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이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그런 생각은 금새 없어졌습니다. 이곳에서 지낸 8년 동안 제 자신이 더욱 성숙하고, 더욱 사람다워지고, 더 가까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느리지만 더불어 함께 사는 물만골의 삶에서 학연도 지연도 없이 가난하지만 사랑하며 살았던 예수의 모습을 본다는 조성제 신부의 말이다.
악수를 뜨러왔다가 우연히 공부방에 참여하게 된 김진우씨, 스스로 봉사할 곳을 찾다가 몇 년째 눌러앉은 김영택씨, 공부방 한 켠에서 더 넓은 세상을 본다는 원은희씨, 교사직의 달란트를 나눠주고 싶어 찾아온 김경애씨 등등. 선생님들 한사람 한사람도 진정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음이 아니라 가슴 속에 사랑이 없는 것임을 이곳 물만골 공부방에서 깨달았다.
선생님들 중 신자는 반도 안된다. 학생들도 대부분 비신자, 그러나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연극, 수화공연, 풍물 등을 연습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물씬 풍겨난다. 사랑의 나눔이 가득한 성탄의 기쁨은 물만골 곳곳에 녹아들고 있었다.
■ 물만골 놀이방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얻어 갑니다’
20여평 공간 20여명 북적 … 넉넉친 않아도 모자람 채워져
오전 9시. 물만골 놀이방이 아이들의 웃음소리, 뛰노는 발걸음소리가 가득차기 시작한다. 어려운 집안형편에 못이긴 엄마가 가출한 후 할머니 손에 자라는 준희, 이른 아침 엄마, 아빠가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시는 민정이 유정이 자매, 20개월된 막내 호영이…. 6세 미만의 어린이 20여명이 전교의 가르멜 수녀회소속 헬레나 수녀, 히야친따 수녀, 아가페 수녀의 따스한 손길아래 무럭무럭 꿈을 키운다. 넉넉잖은 살림에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을 보내기는 역부족. 지난 98년 문을 연 물만골 놀이방이 부모들의 큰 짐을 덜어준다. 회비는 한달에 3만원. 매일 2번씩 제공되는 간식과 점심값에도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하지만 교육의 질은 우수하다. 전문 유아교육과정을 수료한 수녀들이 글공부, 레크리에이션, 각종 특활교육을 골고루 지도한다. 때로는 20여명의 아이들 각가의 나이에 맞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선 수녀들의 손길만으로는 벅찬 경우가 많다. 20여평도 채 안되는 공간도 아이들이 뛰어놀기엔 좁기만 하다. 공간이 부족하기는 물만골 공부방도 마찬가지. 그래도 헬레나 수녀는 『날마다 아이들에게서 참행복을 느끼고 또한 기적을 체험하며 산다』고 말한다. 각종 장난감이며 책장, 싱크대 등은 모두 재활용품. 부산교구 토현본당 신자들이 매달 이발봉사를 오고, 어떤 요리연구가는 아이들 생일에 맞춰 축하케이크를 보내준다. 절대 이름을 밝히지 않아 그냥 「과자 아저씨」라고 불리는 이는 한달도 빠지지 않고 아이들 간식거리를 풍성히 보내준다. 때문에 물만골 놀이방은 넉넉치는 않지만 모자람도 없이 꾸려진다. 말로만이 아니라 한두번 돕고 자기만족에 빠져버리는 동정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고 적지만 가진 것을 나누어 갖는 삶의 변화를 이곳 물만골에서는 항상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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