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때로는 가장 가깝게 지내는 이를 ‘가깝다’는 이유로 정성을 들이지 않고 지내거나, 많은 것을 간과하고 지낸다. 잘 알면서도 잘 모른다는 말은 이때 쓰이는 말인 듯하다. 우리나라의 첫 번째 사제로 누구에게나 친숙한 김대건 성인을 우리는 가장 잘 알지만, 잘 모르고 있다.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맞으며 우리 가까이에 있는 성인 김대건을 ‘성지’를 통해 새롭게 기억한다.
■ 솔뫼성지(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성지는 김대건 성인의 ‘탄생지’로도 유명하다.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이냐시오)·고 우르술라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솔뫼는 김대건 성인의 집안이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인데, 김대건 성인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50세에 영세한 이후 교우마을이 됐다. 하지만 김대건 일가는 1827년 정해박해를 피해 정든 솔뫼를 떠나야만 했다.
■ 골배마실(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김대건의 조부 김택현은 박해를 피해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한덕동 등 여러 곳으로 옮겨 살았다. 김대건이 골배마실에 터를 잡은 것도 1830년 김택현이 사망한 후 김제준이 가족을 데리고 한덕동 이웃의 골배마실로 이주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비록 정든 솔뫼를 떠나왔지만 김대건의 신앙은 더욱 놀라운 신비로 이어졌다. 1836년 모방 신부가 부활절을 전후해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공소’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소년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고 세례를 준다. 또한 그 인연으로 그해 김대건은 최양업과 최방제 등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마카오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대표부로 떠난다.
■ 용수리포구(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마카오로 건너간 지 9년 만인 1845년,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로부터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8월 31일 청운의 꿈을 안고 조선을 향해 출항했다.
제주 용수리포구는 김대건 신부 일행이 서해바다에서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9월 28일 표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제주도 앞에 있는 작은 섬(차귀도로 추정)에 표착해 배를 수리하고 양식을 얻은 후 육지로 떠났다’는 기록처럼 이곳에서 배를 수리하고 음식을 준비한 듯하며, 이곳을 떠난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 나바위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현재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이 있으며, 기념 성당과 라파엘호도 건립, 복원했다.
■ 나바위성당(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1158)
제주도를 거쳐 42일만인 1845년 10월 12일 밤, 이곳 강경 부근의 황산포구 나바위 기슭에 상륙하게 된 김대건 신부 일행은 드디어 조선의 육지를 밟게 된 것에 환호했을 것이다. 김 신부와 신자들은 일행 중 외국인인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에게 상복을 입혀 상주로 변장시킨 후, 약 3km 떨어져있는 강경읍 홍교동에 살던 신자 구순오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르모렐 신부가 김대건 신부 일행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7년 성당을 설립해 1906년 완공했으며,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화산 위에 김대건 신부 순교비도 세웠다.
■ 은이성지(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은이는 골배마실에 살던 소년 김대건이 세례성사와 첫영성체를 한 곳이기도 하지만, 사제로 다시 돌아온 김대건이 짧은 기간 사목활동을 펼친 의미 있는 곳이다. 조선땅을 밟은 그는 1845년 연말까지 서울 일대에서 2개월간 활동하다가 1846년 초부터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동생 김난식(프란치스코)이 살고 있는 은이로 가서 부활대축일까지 약 4개월 동안 짧은 사목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또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기 직전 공식적으로 ‘최후의 미사’를 봉헌했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 새남터성지(서울시 용산구 이촌2동)
1846년 병오박해가 터지고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 10일 해주 감영으로 이송됐다가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된 김대건은 3개월 동안 40차례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사형을 선고 받은 바로 다음날인 16일, 그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는데 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조선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과 국사범과 같은 중죄인들의 처형장으로 이용돼왔던 새남터는 1801년 신유박해부터 천주교 신자들의 악명 높은 처형지가 돼왔다.
■ 미리내성지(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면서 신자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우리나라의 첫 번째 사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슬픔을 머금은 교우들은 위험에도 불구,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미리내로 옮겨 안장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펼쳐진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작업으로 그의 유해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하악골은 미리내 경당에 남게 됐으며 1928년 본래 무덤이 있던 자리에 김대건 신부의 경당이 건립됐다.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의 시신도 이곳 인근에 안장돼 있으며, 페레올 주교의 시신도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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