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레시오회(관구장 남상헌 신부)는 6월 24일 오후 2시 서울 신길동 살레시오회 관구관 7층에서 ‘톤즈의 돈 보스코 이태석 신부의 삶과 영성’ 심포지엄을 열었다. 교회 안팎에서 이태석 신부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열린 심포지엄은 수도자이자 사제인 이태석 신부의 삶과 그를 일으켜 세운 영성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 마련됐다.
사제와 수도자 등 750여 명이 참석한 이날 심포지엄은 백광현·양승국 신부(살레시오회), 신경숙(데레사) 순천향대 구미병원 가정의학과 의사, 문용린(요한 보스코) 서울대 교수 등 4명이 주제 발표를 했다.
살레시오회 관구장 남상헌 신부는 “이태석 신부의 숭고한 삶을 균형 있게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흥미를 충족시키는 시각으로 바라보거나 혹은 경제적 관심으로 접근하는 이들도 생겨나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남 신부는 또 “우리가 이 신부를 기린다고 할 때, 그의 삶과 활동에 밑바탕이 된 것에 대해 잘 아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적인 일”이라며 “심포지엄을 통해 이태석 신부와 함께한 두 분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우리 사회가 왜 이 신부에게 감동 받는지 규명하며 그의 영성을 살펴본다”고 심포지엄의 취지를 밝혔다.
심포지엄에 참석한 전임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이태석 신부의 사제로서, 살레시오회 수도자로서, 의사로서, 선교사로서의 삶과 영성을 조명하는 이번 심포지엄이 이 신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을 비롯, 이 신부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의 눈으로 이태석 신부 보고 읽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는 “이 신부는 우리에게 참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며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태석 신드롬’을 올바로 읽을 수 있는 지혜를 우리 모두 함께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박진홍 신부(대전교구)를 통해 전했다.
이태석 신부의 영명축일이자 사제수품일에 마련된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영화 ‘울지마 톤즈’ 배급을 맡은 마운틴픽쳐스 이재식 대표가 아프리카 선교활동을 위한 후원금을 살레시오회에 전달했다.
다음은 발표 내용 요약.
■ 돈 보스코 정신과 이태석 신부 - 백광현 신부
“‘톤즈의 돈 보스코’로 불러 달라”
▲ 백광현 신부
이태석 신부는 살레시오 사제로서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인 청소년들, 특히 보다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을 보여줬다.
그것은 ‘사랑과 복음 전파를 보다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버림받고 위험 중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대한 우선권을 재확인하며 특히 보다 가난한 지역에서 일했던’(회헌 26조) 사부 돈 보스코의 정신이 그 삶 안에서 그대로 녹아나는 사랑이다.
살레시오 회원은 시련에 직면했을 때에도 창립자인 돈 보스코의 모범을 따라 실망하지 않고 내적 평화를 잃지 않는다. 이태석 신부도 돈 보스코처럼 하느님의 사업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며, 시련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는 ‘섭리의 길’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수단으로 들어갔다.
돈 보스코의 정신을 알기 위해선 그가 처음으로 시작했던 발도코의 오라토리오를 알아야 한다. 그의 오라토리오는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하며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을 받아들여 그들에게 빵과 잠자리, 일터와 학교가 되었고 그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희망의 터전이었다. 이태석 신부는 수단 톤즈 마을을 발도코의 오라토리오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곳으로 만들어갔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를 ‘수단의 슈바이처’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에게 가장 영예로운 호칭이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태석 신부가 살레시오회의 사제요, 선교사가 되면서 가장 닮고 싶었던 유일한 모델은 슈바이처가 아니라 돈 보스코였을 것이다.
1996년 12월에 이태석 신부가 장상에게 제출한 ‘서원갱신 청원서’에서 돈 보스코를 닮은 살레시안으로서의 길을 자신 있게 그리고 꾸준히 선택하겠다는 그의 엄숙한 다짐을 다시 만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태석 신부에게 가장 영예로운 명칭은 ‘수단의 슈바이처’가 아니라 ‘톤즈의 돈 보스코’라고 말할 수 있다.
■ 이태석 신부의 영성 - 양승국 신부
“구체적·일상적 영성 우리도 따라야”
▲ 양승국 신부
돈 보스코의 노선은 이태석 신부의 생애 안에서 똑같이 되풀이된다. 그는 청소년들 가운데서도 보다 가난한 청소년들, 어려운 청소년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자주 표현했다. 또한 이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데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다. 특별히 톤즈의 주민 가운데서도 더욱 소외된 삶을 살아가던 나환우들에 대한 그의 각별한 사랑과 우선적인 선택은 주목할 만하다.
초기 오라토리오 시절, 돈 보스코는 예수님처럼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청소년들을 찾아다녔다. 자기도 모르게 깊은 늪으로 빠져 들어간 청소년들을 만나기 위해 소년원을 방문했다. 이태석 신부 역시 마찬가지다. 병원을 지어놓고 찾아오는 환자들만 치료하지 않고 걸어올 힘도 없어 죽어가는 수많은 다른 환자들을 찾아 정기적으로 이동진료를 떠나곤 했다. 또한 톤즈 청소년들의 친구가 되길 원해 하루 온종일 동고동락하며 가족이 되길 원했다. 이방인 선교사가 아닌 그들의 동반자이기를 원했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역량을 120% 발휘했다. 이 신부도 자신의 다재다능한 능력으로 짧은 기간 내 1500명 규모의 학교와 병원을 건립하고 이동진료를 계속했다. 이 신부는 목표가 정해지면 투신하는 경향을 보였다. 청소년들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투철하게 매진하는 뜨거운 사목적 열정의 소유자였다.
이태석 신부는 그 어떤 존재이기에 앞서 돈 보스코의 제자이자 한 살레시오 회원이었다. 톤즈에서 펼쳤던 숭고한 교육 사목활동은 돈 보스코께서 토리노 오라토리오에서 펼쳤던 사목활동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이 신부는 짧은 기간이나마 돈 보스코를 통해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매일 자신의 삶 안에서 충실하게 실천했던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이태석 신부의 영성은 돈 보스코의 영성과 맥을 같이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신부의 영성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현대적 영성이다. 지금 우리가 이태석 신부의 삶에 매료되고 그를 꾸준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의 영성이 바로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영성이기 때문이다.
■ 선교사, 이태석 신부 - 신경숙
“장기적·체계적 선교사 지원 절실”
▲ 신경숙씨
신부님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시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시는가 하면, 스스로 그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리기도 하셨다. ‘존 리 신부님은 내 편이 될 거야’라는 믿음이 아닌, ‘그분은 내 말을 가장 잘 들어줄 수 있을 거야’란 생각으로 아이들은 분쟁이 있을 때마다 신부님을 찾아오곤 하였다.
이 신부님이 훌륭한 것은 어려운 환경을 고통 속에서 감내하고 인내하여서가 아니라 톤즈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시고, 행복하게 사셨다는 것이다. 최근 왜곡된 방송이나 매체, 혹은 개인적인 친분으로 말하는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는 자칫 무차별적인 물질적 지원만을 쏟아붓는 결과를 초래할까 매우 우려스럽고 안타깝다. 신부님에 대한 감동과 존경으로 만들어진 그 뜨거운 열정과 관심은 현지 상황을 고려하여, 장기적이고 계획적인 방법으로 서서히 토해져야 한다. 그러기에 이태석 신부님과 같은 정신으로 현장에 존재하는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이며, 신부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고 지키고자 하셨던 톤즈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방법일 것이다.
■ 왜 이태석 신부에게 감동받는가? - 문용린 교수
“신드롬의 이유는 ‘성령의 힘’”
▲ 문용린 교수
많은 이들은 이 신부의 삶 속에서 희망을 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장 비참한 삶이 진행되는 곳, 톤즈. 그래서 희망도 보이지 않고 절망만이 가득해 보이는 곳. 그런 곳에 뛰어든 젊은 신부가 의술로, 사랑으로, 음악으로 절망과 낙담, 비관과 불행을 평화와 희망으로 변화시켜서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변모시켜가는 희망의 불씨를 느꼈기 때문에 그 감동으로 운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보편적 감동을 일으키며,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성찰하는 계기를 주고 선한 행동에 대한 강박관념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런 감동 특징의 나열이 우리가 왜 이태석 신부에게 감동하는 지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는다. 필자는 그 답을 이태석 신부의 글에서 찾았다. 그는 미국 LA의 강연이 청중들에게 감동을 준 이유를 이렇게 명쾌하게 설명한다.
“(나의 강연을 듣는) 그들의 눈은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고, 눈가에 맺힌 이슬은 투명한 보석과도 같았다. 그들은 내 보잘 것 없는 이야기를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있었다. 그 순간의 일치와 일치된 시간 안에서 느껴지는 행복한 전율은 내 능력도, 그들의 능력도 아닌 바로 성령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왜 우리는 이태석 신부에게 감동하는가에 대한 이태석 신부 자신의 대답은 성령이 그렇게 감동하도록 작용하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