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7월 20일에 순교한 8명의 교우 중에서 이매임과 김장금에 대한 개인기록은 별로 나타나 있지 않으나, 부분적인 불교생활에서도 그들의 신심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매임 데레사는 1788년(정조12년)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기해년 7월 20일에 순교한 이영희(李英喜) 막달레나와 9월 3일에 순교한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남매의 고모로서, 그들 남매가 외교인이었던 부친의 반대로 신앙생활이 자유롭지 못하여 서울로 숨겨 보호하여 주었다. 또한 갈 곳이 없는 열심한 신자들을 자기의 집에 머물도록 하여 신앙생활을 도와주었다. 이것으로 볼 때 데레사는 성교를 안 후부터 이미 교우였던 남편과 함께 열심히 신자생활을 하였던 것이며, 또한 가난한 교우들의 부모노릇을 하였던 듯하다.
기해년에 이르러 박해가 시작되고, 남명혁(南明赫)이 광헌(李光獻)등의 교회지도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데레사의 집에는 그녀가 박애심으로 받아들인 열심한 여교우 2명이 있었는데, 한명은 이미 설명한 김성임 마르타요 또 한 사람은 김 루치아(金累時阿)였다. 그리고 조카딸 2명과 그들의 어머니이며 데레사의 올케인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 등도 있었다. 이 여섯명의 여교우들은 어느 날 교회에 대한 박해·순교자들의 용맹·천국의 행복들을 이야기하다가 거룩한 열정이 분발하여 포청에 자수함으로써 신앙을 증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4월 11일에 이미 포졸들의 출장소가 되어버린 남명혁의 집으로 가서 자수하기에 이르렀다.
포졸들은 어이가 없어 자수한다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들을 체포하려들지도 않았다. 이에 데레사와 다섯 여교우들은 자기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증거로 묵주를 내보이며 졸라서 마침내는 포도청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포장은 이 여교우들이 자수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놀랐으며, 한편으로 자존심도 상하였다고 한다.
데레사 등은 포청으로 압송된 후에도 한결같이 놀라운 용기를 보여주었다. 포장이 배교하라고 독촉하니 여섯 교우들은 일제히 자신들은 천주교의 도리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며, 『만일 저희가 천주를 배반하고 우리 교를 버릴 생각이라면 우리스스로 자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분명이 대답하였다. 포장은 그들이 배교치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그들이 자수하였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형벌을 배로하도록 하였으나 아무소용이 없었다.
닷새 후 그들은 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포장 앞으로 끌려나왔다. 포장이 그들에게 『이제는 옥의 괴로움을 맛보았으니 생각을 돌렸느냐』고 하며 배교를 위협하였지만, 그들은『포장님 앞에서 저희들이 어떻게 오늘은 이렇게 말하고 내일은 저렇게 말하겠습니까. 저희들의 결심은 변함이 없으니 나라법대로 죽여 주십시오』라 대답할 뿐이었다. 형리들이 아무리 악착같이 이 무죄한 죄수 등을 때려도 이들은 거의 괴로운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마침내 용맹한 교우들은 형조로 이송됐다.
형조로 옮겨져서도 그들은 표청에서와 같은 문초와 형벌을 당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천주를 믿고 그분을 위하여 피를 흘리겠노라고 결실을 표명하였다. 형관은 그들이 자수한 것을 벌하기 위하여 다른 교우들보다 더 혹독하게 때리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하여도 그 불굴의 용기는 꺾이지 아니 하였으며, 이에 형관은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기에 이르렀다.
사형선고를 받은 뒤에도 그들은 여러 주일 동안 옥중의 간고와 굶주림을 겪어야 하였다. 마침내 이들 여섯 중에서 우선 김 마르타 이 막달레나 김 루치아 그리고 이 데레사 등 4명이 7월 20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치명하였으니, 이때 데레사의 나이는 52세였다.
김장금 안나는 1789년 (정조1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녀의 집안이 천주교 신자들이었는지라 어려서부터 교리를 열심히 행할 수가 있었다.
중년에 이르러 과부가 된 후로는 친정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였는데, 빈고를 감수하여 인내하며 효성을 다하여 극진히 모시었다.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그녀의 모친은 이미 나이가 많았으나 성사를 타당히 받고 선종하였다. 안나가 살던 집은 이광열(李光烈) 요한의 집과 이웃하여 있었는데, 두 집안의 화목하기가 한 집안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기해년 4월 8일 안나는 이광렬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압송되었다.
포청에 이르러 여러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그녀는 끝까지 배교치 아니하였다. 그 후 형조로 옮겨져 사형선고를 받고, 옥에 있은 지 석달만인 7월 20일 서소문밖에서 다른 교우들과 함께 참수치명하니, 그때 그녀의 나이 5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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