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력이 물러남에 따라 기해년 6월 말에는 궁중의 권력이 거의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는데 이들 외척세력은 천주교인들을 가장 적대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7월 5일 희정당(熙政黨)에서 열린 중신회의(重臣會議)로부터 새로운 법령이 작성되어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의 명의로 반포되기에 이르렀다.
대왕비는 근래에 잡힌 천주교인들이 별로 없다는 말을 듣고, 대신(大臣)과 포장(捕長)들에게 천주교인들의 탄압에 소홀하였음을 책한후,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으로 하여금 포장들을 불러 더욱 신칙(申飭)하도록 하달하였다.
이때 교우들 중에는 배반자 김순성(金順性,또는 여상)이 거짓형제로서 끼어있었는데, 그는 모든 일에 열심인체 하여 교우들로부터 신임을 얻는 한편, 관헌들에게는 교우들의 일을 상세히 밀고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며칠 사이에 조신철(趙信喆) 정하상(丁夏祥) 유진길(劉進吉) 등 가장 중요한 교회 인사들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이와 동시에 얼마전에 신문을 끝낸 몇몇 신자들의 처형을 결정하여 7월 20일에는 8명의 교우들이 서소문(西小門)밖에서 참수되었다. 그들은 이광렬, 김노사(金老沙),김성임(金成任) 이매임(李梅任), 김장금(金長金), 이영희(李英喜), 김누시아(金累時阿), 윈귀임(元貴任) 등의 열심인 교우들이었는바, 이 용감한 순교자 무리의 으뜸은 이광렬이었다.
이광렬의 본명은 요한이며 5월 24일에 이미 순교한 이광헌(李光獻) 회장의 아우이다. 「光烈」은 관찬사료(官撰史料)에서 보이는 이름이고,교회측 사료인「기해일기」에서는 「경삼」으로 기록되어있다.일찌기 형과 함께 참수될 것이었으나 조선의 국법에 한 형제를 같은날 사형하는것을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처형을 미루어온 것이었다.
본래 그의 집안이 외교인이었기 때문에 장성하도록 성교의 도리를 모르고 있다가 형과 함께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곧 이를 믿기시작하였다. 그는 열심으로 교리를 행하여 헌신적이고 독실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따라서 입교한지 얼마안되어 교우들은 그를 北京왕래의 중요한 사명을 맡은 지도자들중에 끼어 주었다. 당시 이들 교회지도자들이 행한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北京으로부터 선교사를 무사히 영접하는 일이었다. 이광렬도 이러한 일에 참여하게된 것으로 즉 1836년 1월에 그는 조신철 정하상 등과 더불어 국경지방의 책문(柵門)으로 가서 모방(Maubant )신부를 모셔들여 서울로 인도하였으명 그해 12월 말에 또한 그들과 함께 샤스땅(Chastan) 신부를 맞이하여 입국시켰던 것이다.
그는 北京을 두차례 왕복하였고 北京에서 영세와 함께 요한이라는 본명도 받기에 이르렀다. 北京에 있을때에는 그의 충실함과 열심한 수계생활로 인하여 그곳 신부와 수사들까지도 그의 행위에 찬미하고 그를 사랑하였다고 한다.
北京에서 성사를 받고 돌아온후 요한은 육미(肉味)를 입에 대는 일이 없었으며, 그때까지도 미혼이었으나 결혼할 생각을 일체 끊어버려 독신으로 지내기로 결심하였다. 또한 그의 모습은 항상 주와 더불어 부합(符合)한 듯한 모양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성사(聖事)라는 특별한 신은(神恩)의 효험을 증거하는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그가 춘주와 기밀히, 그리고 계속 적으로 결합하여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를 방해할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편으로 그는 이때부터 항상 주를 위하여 치명할 원의(愿意)를 갖게 되었다.
기해년 4월 8일 밤에 포졸들은 먼저 남명혁(南明赫) 회장의 집을 습격하여 가족들을 체포한 다음 이광헌 회장의 집으로 들이닥쳐 그의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이광헌 회장은 서소문 밖에 교우들이 마련하여준 기와집에서 거처하고 있었고 동생인 요한은 그곳에서 멀지않은 마을의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따로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요한은 노모를 모시고 김장금이란 여교우와 함께 분장사를 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다가 형네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포청에 압송된후 요한은 형과 한가지로 문초와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형과 더불어 굳셈이 한결 같았다. 요한은 여러 차례 주뢰(周牢)를 틀리고 곤장(棍杖)을 맞고 오랫동안 옥에 갇혀있다가 다시 법정에 불려나가 각장형(角杖刑)과 태형(答刑)을 당하였다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표명하며 언제까지도 그것을 버리지 않겠다고 단언하였다. 옥중에 있은지 여러달 동안 그는 열성과 인내로 함께 갇혀 있는 모든 이들을 감화시켰다고 한다. 그러다가 앞에서 말한 7명의 여교우들과 함께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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