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의 침입, 민족간의 전쟁 등 근대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지역내에서나마 한글을 수호하고 각종 문화운동을 일으키며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던「전주가톨릭청년회」.
지금은 잊혀져 역사의 한 귀퉁이조차 차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전주가톨릭청년회는 1929년 아직 전주교구가 성정되기 이전인 남방교구 시절, 일제의 민족혼 말살정책이 피크에 달했을 때 태어났다. 전동본당을 중심으로 지역 내, 20~40代의 식자층 청년들이 모여 창설된 전주가톨릭청년회는 일본형사들의 감시의 눈길 속에서도 말살되어가는 한국어와 문화를 잇기 위해 주력했으며 교회음악 보급 및 교육사업의 초석이 되는 등 그 시대의 청년이 짊어져야했던 십자가를 선구자적인 시각과 행동으로 감내해 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언로(言路)가 차단된데다가 행동마저 규제받고 있던 당시, 신자나 미신자를 가릴 것 없이 유학생 문인 등 지성그룹이 갈 데가 없었던 상황 하에서 교회는 이들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성당에만 가면 지성그룹이 종횡으로 연결되었다.
기톨릭 청년회원 역시 성직자중심의 교회에 순명은 하면서도 민족혼수호에 있어서는 과감하게 나섰다. 주체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한 교회의 입장에서 당시 청년회원들 대부분이 지방유지의 자손이기도했지만 능력이었어도 日人밑에서 일하기를 꺼려해 취직을 거부했다.
따라서 자연히 이들은 성당에 모여들었고 무언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공통분모에 도달, 1929년 9월 가톨릭청년회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창립멤버들의 이름이나 회칙·활동상황등이 기재돼있는 문서를 찾을 길 없어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2대 회원으로 많은 활약을 했던 金順成(61세)씨에 따르면 한동수·임철종·이현석·김길수·조영복·이준석·최봉희·정경문씨 등 회원수가 1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회원 대부분이 신교육에 접한데다 항일정신으로 철저히 무장돼 있어 비록 드러나는 행동은 보이지 못했지만 감시의 눈길을 피해 한국어와 한국문화전수를 위한 의식화작업을 전개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청년들에 대한 기성세대의 기대는 컸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 이들은 당시 조선어학회가 발행하던 「한글」지가 일경에 의해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혀 배포에 어려움을 겪자「한글」지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다.
또 1935년에는 6인조 밴드를 조직, 악기를 해성학교에 빌려주어 국민학교로서는 최초로 밴드를 앞세운 시가행진을 하게 했으며 4대 첨례때의 전례봉사와 재해문제해결에 앞장서기도 했다.
또 청년회는 전동본당성가대를 지도하는 동시에 주일 학교 어린이교리반도 운영했으며 도립방송국을 통해 성가를 발표, 성가보급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또 안으로는 교양강좌, 성서연구, 시사토론회 등을 가지면서 의식계발에 힘썼다.
이와 함께 한 가지 넘길 수 없는 일은 일본의 마지막 발악이기도 했던 쇠붙이 공출에 성당의종이 예외일수가 없을 때 청년회회원들은 일인형사에게『종이야말로 비상 연락수단인데 없애면 안된다』고 설득, 전동본당 종만은 공출에서 제외되게 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소식을 일찌기 접한 신자들은 해방 이틀 전부터 전동본당의 종으로 해방의 소식을 전하며 감격의 소식을 전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쳥년 회원들은 마냥 해방의 기쁨에만 젖어있을 수 없었다. 교사들조차 잊어가는 한글을 깨우치기 위해 청년 회원들은 성심학교의 강당을 빌려 한글강습회를 개최, 한글 및 역사 강습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교구장이던 주재용 신부가 역사를 강의하고 한글은 임철종·이현석씨가 강의한 한글강습회에는 고위 간부직에 있었던 이들로부터 어린이까지 참가했다.
청년회는「뜻글과 쓰임」이란 책자를 직접 편찬, 무료로 배부 했는데 김순성씨에 따르면 이때 배부한 부수가 3천부에 이르렀고 한글 강습회에 참가한 이들은 5백명을 넘었다고 한다.
당시 한글을 강의한 임철종씨는 한글학회 회원으로, 경향잡지에 희곡이 당선되기도 했는데 임씨는 와세다 전문부 강의록으로 독학, 와세다서 편입허가서를 동봉한 초청장까지 보내왔으나 거절했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청년회는 한글강습회가 성공적으 되자 이듬해인 1946년 전주 도립극장을 빌려 연극「김대건신부전」을 공연, 절찬을 받았다.
「순교자」를 타이틀로 한 이 공연에는 도내시민은 물론 여수·순천등지에서도 참가, 지 지방공연을 요청했으나 3.40평이나 되는 인원이 불편한 교통으로는 도저히 이동할 수가 없어 거절해야만 했다.
이러한 기쁨도 잠깐, 민족의 비극 6.25가 발발하자 청년회는 성직자들이 잡혀가 빈 본당을 지켜야 했고 몰래 모여서 태극기도 만들며 뼈만 남아 돌아온 신부들의 사목을 도왔다.
그러나 청년회가 언제부터 사라져 버렸는지는 확실히 모른다.
몇 번 부활의 시도가 있었지만 극히 미미 하게 끝나버려 교구 안에서 맥을 잇지 못했고 회원들 역시 타계하거나 객지로 흩어져 버려 소식조차 알 수 없다.
창립맴버 중 한동수씨(춘천시효자2동 164의5)만이 간간이 연락이 닿을 뿐이라는 김순성씨는 『아무런 기록이나 문서도 없이 다만 잊혀져가는 기억만을 되살려 정리하고 있다』고 안타까와 하면서 『다원화 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옛날 청년회의 성격을 그대로 살릴 수는 없지만 「청년연합회」등의 형식으로나마 그 맥을 이어나갈 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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