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섭은 목소리가 가랑잎 구르는 소리 같은 어른머슴의 코고는 소리도 역겹지가 않았다. 그는 달빛이 환하게 어려 있는 방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방문 창호지에 애기 씨로부터 배운 글자들을 수없이 그려보곤 하였다. 아버지 어머니도 여러 번 써 보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를 쓸 때는 왠지 마음이 허전하고 적막하였다. 별로 써 보고 싶지가 않았다. 자신의 이름자를 쓸 때도 별로 감동이 없었다. 종래는 무덤덤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애기 씨의 이름자를 쓸 때는 이상하게 힘이 났다.
자꾸만 쓰고 싶었다. 아무리 써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달빛이 환하게 어려있는 방문 창호지에 오영주……애기 씨의 이름자를 쓰고 또 쓰고 무수히 그려 보았다.
그러며 그는 자신이 오늘 하루 동안에 배운 여러 글자를 아주 능숙하게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고、그것에서 뼈저린 희열을 맛보았다. 다음날부터 기섭은 한결 재빠르고 힘찬 모습으로 일을 하였다. 매우 원기 왕성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평소의 어리보기 모습과는 딴판인 본새였다. 그는 서방님 신상의 구질구질한 일도 별로 역겹지가 않았다.
오후가 되어 학교에서 애기 씨가 돌아오면 기섭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가슴 가득히 무놀지는 기대로 숨이 가쁘기도 하였다.
애기 씨는 기섭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기섭을 이끌고 뒷동산 호젓한 잔디밭으로 가서 선생님이 되어 주곤 하였다.
언제나 근엄하고 신비스럽기 조차한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같이 뒷동산에 올랐다. 양지바른 잔디밭은 지엄하고 성스러운 자리였다. 애기 씨는 열심히 가르쳤고 기섭은 똑바로 정신 차리고 열심히 배웠다. 기섭은 겉보기로는 어려 보였고 아둔패기 같었지만 속으로는 옹골진 데가 있었다. 실은 옹골찬 아이다. 그는 공부를 잘 하였다.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들었다. 더러는 꾸중을 듣기도 하고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는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정말 흔치 않았다.
어쩌다 매를 맞는 것도 실은 거의가 기섭의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때때로 심심하면 훤히 아는 것도 짐짓 까먹은 척 해가지고、그렇게 일부러 매를 맞고 하는 것이었다. 손바닥에 회초리를 받을 때는 오히려 기분이 상쾌하였다. 회초리가 휙 휙 공기를 가르고 탁탁 손바닥에 떨어질 때는、그 한 순간은 따갑고 아팠지만 이내 상쾌한 쾌감이 우러올라서 그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고、이상한 행복감마저 드는 것이었다. 오래가지 않아서 기섭은 한글을 모두 깨우치고 익혔다. 드디어 문맹을 벗어난 것이었다.
기섭이 한글을 모두 익히자 애기 씨는 그에게 산수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덧셈과 뺄셈을 가르치고、구구단을 외우게 한 다음 곱셈과 나눗셈과 분수 같은 것도 가르쳤다. 기섭은 산수를 잘 하였다. 산수도 그에게는 재미있는 공부였다. 정녕 꿈 같은 날들이었다.
감미로운 명지바람、싱그러운 풀 내음、푸른 하늘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흰 구름과 같은 날들이었다.
그러나 그 꿈 같은 날들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겨우 가을을 넘기고 끝이 나버렸다. 몸이 약한 애기 씨가 겨울로 들어서면서 자주 몸 져 눕는 일이 생기는데다가、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른들이 일절 애기 씨를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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