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죄악이 없다면 얼마나 좋은가? 상상하기엔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이다. 왜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해서 불안하고 문을 잠그고 대문을 닫아야 하는가?
스스로가 죄 인줄 알면서 왜 그런 구렁텅이로 빠져야 하는가?
갖가지 모순의 문제를「악」으로 집약 해보자. 그렇다면「악」은 무엇인가? 철학적인 용어를 떠나서 쉽게「악」은「질서의 파괴」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그 개념이 표현된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질서는 이 세상에 세 가지가 있다. 자연 질서, 윤리질서, 형이상학적인 질서. 그렇다면 그 질서가 파괴되는 소위「질서의 파괴」현상도 세 가지로 나타난다. 자연 질서가 파괴되는「자연 질서의 악」「윤리질서가 깨어지는「윤리악」형이상학적인 질서가 파괴되는「형이상학적인 악」이다.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도 윤리질서문제요, 여기서 오는「윤리 악」의 문제이다.
윤리질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질서이다. 내가 행동하는「너」와의 관계에서 오는 인륜의 기본질서이다. 그런데 내가 상대로 하는「너」가 누군가에 따라 그 윤리행위의 비중은 달라진다. 예컨대 같은 주먹질을 하되 아버지에게 한 것과 친구에게 한 것은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우리는 솔직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나에게 생명을 주신 생명의 주인공이신 그 절대자와의 윤리관계보다 더 큰 윤리질서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과나무가 사과라는 과일을 맺기 위해서는 자연 질서에 순응해야 하고 그 결실을 위한 자연 질서가 전제되어있다고 한다면「인간완성」이란 과정에도 그 질서가 있을 것이고 그 질서가 전제되어야 인간의 존재문제를 운운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인간의 존재와 함께 생명의 결실을 위해서 주어진 최종의 윤리질서는 절대자와 인간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일 것이다.
그 질서가 파괴된다고 했을 때 오는 모든 윤리악의 결과를 상상해본다. 너무나도 엄청난 결과이다. 이것을 우리는 태초에 윤리질서가 파괴되는 순간이요 동시에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해서「원죄」(原罪)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모순과 부조리 앞에 그리고 모든「악」이 도사리고 있는 현실 앞에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원죄」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것으로 오는 결과와 그것을 해결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의 모든 부조리의 원인이「원죄」라고 했을 때 우리에게 부닥치는「원죄」의 의미를 깨닫는 과제는 오직 우리의 삶과 행복과 직결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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