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1의 함도이며 한국의 얼굴이라 일컫는 부산에서 태동된 평신도 활동은 젊음과 활기로 교회를 이끌어간 젊은이들로 이뤄졌다.
1957년 부산교구 설정과 더불어 교구 내에는 평신도 사도직협의회、대학생연합회、JOC 등 각 분야의 평신도들이 각기 제 몫을 찾아 교회내외에서 활발히 사도 직을 수행하고 있지만 교구설정 훨씬 이전에 교회의 청년들은 그들의 힘을 합쳐 전교와 봉사활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1943년 범일동 본당 청년회 결성으로 서서히 교회내의 젊은 힘을 뭉친 청년회는 교구설정 후 평협의 전신인 신자협의회 결성에도 큰 몫을 담당했다
현재는 평협이 구성돼 있으나 그 당시만 해도 본당 별 기구와 조직이 다름은 물론 대부분 본당이 사제를 중심으로 본당을 운영하던 때라 청년회 활동은 신자협의회 구성의 활력소가 됐다.
또한 청년회 회원들이 교회 전례를 알고 각본당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함에 따라 사도 직 활동에 보다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대부분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 본당 고문 역할이나 아직도 사목위원으로 본당의 중책을 맡고 있다.
청년회 발족회원들은 회장을 맡은 김응주씨를 비롯 서정호 문장준 방호남 문태호 서진영씨 등인데 해방과6ㆍ25사면 등 격동기에 활동한 회원 대부분은 작고했거나 서울 등지로 옮겨갔다고 밝히는 김응수선생은 연락이 두절돼 안타깝다면서 어디에 있거나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부산 가톨릭 청년회는 처음 1943년 범일동 본당에서 친목도모와 교회 일을 도울 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범일본당 14대 주임 신부는 이들 청년들의 뜻을 받아들여 적극 지원했다.
범일동 내에서 활동을 펼치던 청년회는 해방과 더불어 중앙 범일청학동 등 3개 본당 연합청년회를 결정、대외적으로 전교활동을 시작했다.
당시만해도 일반인들의 가톨릭에 대한 인식도가 낮음을 감안한 청년회는 전교의 일환으로 경남 남녀 청년웅변대회를 개최、지역사회 복음전파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청년회의 웅변대회는 6ㆍ25전쟁 발발로 중단되기까지 3회에 걸쳐 계속됐는데 가톨릭을 알리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는 관계자들의 얘기이다.
특히 웅변은 일제치하에서와 해방직후의 울분을 터뜨릴 수가 있어 당시 식자층이나 패기 있는 학생들이 많이 참여、효과가 큰 것으로 풀이됐다.
이처럼 청년회의 웅변대회 개최 이후 부산과 경남의 각 고등학교에서는 웅변 부를 만들어 중앙성당으로 지도요청을 하는 등 반응이 컸다. 또한 청년회는 대외적 활동뿐 아니라 내실을 다지기 위해 회원교리공부 등을 실시、신심앙양에 주력했다.
그러나 이처럼 활발하던 청년회활동도 6ㆍ25와 여러 사정으로 인해 활동이 일시 중단됐으나 부산교구가 설립되다 59년 부산교구 청년연합회를 결성、부산ㆍ경남의 20여 개 본당이 연합회에 가담、불우이웃돕기 활동 등을 전개했다. 이처럼 각 본당으로 확산된 청년회회원들은 본당 내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본당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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