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섭의 마음은 허전하고 쓸쓸하였다. 삶의 중요한 바탕을 잃어버린 듯 몸은 개맹이가 없고 마음은 을씨년스럽기만 하였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그의 심란하고 스산한 가슴 속으로 더더욱 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삭풍은 해가 바뀌고 따지기에 이르러도、명지바람이 부는 화창한 봄날에도 가시지를 않았다. 기섭의 가슴 속에서 마냥 흉흉하게 일며 살았다.
애기씨는 기섭을 별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기섭이 수없이 바라고 기대해도 다시는 공부놀이 따위는 까맣게 잊은 듯한 본새였다. 어쩌면 생각하는 것도 싫어하고 기피하는、그런 야멸찬 마음인지도 몰랐다.
기섭은 애기씨의 마음이 달라진 것을 확연히 느꼈다. 애기씨가 어른들의 말을 깊이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어른들의 마음도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닭모를 불안감과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 같았다. 뼈저린 슬픔과 아득한 절망감 같은 느낌들이 그의 어린 가슴에 가득히 밀려든 것 같았다.
기섭이 깔축없이 어두운 마음을 안고 계속 개맹이 없이 살 때 목소리가 가랑잎 구르는 소리 같은 어른 머슴이 그에게 말하였다.
『작년 일 생각허지 말어、이것아. 작년이 애기씨가 너한티 그만큼 글 가르쳐 준 것 만두 과분헌 은혜여. 이것아 어른들 머리로는 상상헐수두 없는、 일이라구! ......너는 애기씨 허구 한자리에 같이 있을 수 없는、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몸이라는 걸 물러? 너허구 애기씨는 근본이 엄청 달러. 이것아 게다가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것두 있잖여. 핵교이서두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을 따루따루 갈라놓구서 공부시킨디야!』
그 말을 듣고 나서 기섭은 문득 예전 일을 떠을없다.
애기씨에게 끝이 흐린말을 하다가 마님한테 들켜서 된통 꾸지람을 듣고 났을 때 어른머슴이 말하던 것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여지없이 바뀌구 온통 개명천지라구 해두 너만은 달러、이놈아. 니가 이집이서 몸붙이구 사는 한……니 조상들부터 그러니께……옛날 같으면 너는 애기씨를 똑바루 쳐다보지두 못혀. 그러구 옛날 같으면 애기씨가 니 할애비한티두 해라를 쓸판이여! 그건나두 마찬가지지만……』
기섭은 그때 느꼈던 아득하고 막막한 느낌들이 다시금 가슴에 휘 몰려드는 듯하여 몸을 떨었다. 아무리 수없이 떨어버려도 계속해서 그에게 덤벼들 것만 같은、진저리 같은 몸 떨림이었다. 그는 너무도 막막하고 아득하여 와락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자신의 마음을 어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와락 울어 버리고만 싶고、죽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날부터 기섭은 애기씨를 보지도 생각하지도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애기씨를 피하면、옆으로 돌며 살았다.
그러나 지난날의 애기씨에 대한 그리움은 수장 그의 가슴에 쌓여갔다. 더불어 슬픔도 수시로 벌불졌다. 애기씨와 자신은 아득한 옛날 선 조상 적부터 본색이 다르다는 것、앞으로도 도저히 나란할 수 없다는 것 등은 그야말로 막막한 슬픔이었다. 한 집에서 노상 가까이 살면서도 애기씨는 아득히 멀고 까마득히 높은 존재였다. 칠흙같이 어둡고 드넓은 강이 가운데를 가르며 마냥 흐르는 속에서 그리움이 수장 쌓여만 가는 세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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