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이라더니 과연 세월은 빨랐다. 기섭의 슬픈 강물에 떠서 세월은 잘도 흘렀다. 어디로 흐르는지 모를 세월의 강이지만…
애기씨는 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여전히 곱고 깔밋한 모습이었다. 국민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기뻐하는, 대견스럽기도 한 모습이었다. 그런 영주애기씨는 서울로 중학교 진학을 해 올라갔다.
기섭의 마음은 더욱 텅 빈듯 허전하고 썰렁하였다.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기쁜 일이라곤 한가지도 없을것 같았다. 애기씨에 대한 얄궃은 그리움은 사라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다.
그의 가슴에 더욱 선명하고 강렬하였다. 정녕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얄궃고도 이상야릇한 그리움이었다. 자신이 왜 지난날과 더불어 영주애기씨를 그리워하는지, 애기씨를 그리워해서 종래에는 어쩔 것인지, 그리움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 나이도 어린 자신의 마음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그는 하나도 알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영주애기씨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그는 바깥 일을 하다가 잠시라도 틈이나면 마을 어귀 고개마루 옆의 산마랑으로 올랐다.
멀리 바라보이는 읍내와 그리고 아스라히 먼 서울쪽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곤 하였다. 다만 하염없는 심정으로, 때로는 시간 가는줄도 몰랐다.
아버지의 뼈를 닮아서인지 성장이 빨라 제법 숙성한 편인 그는 이미 그만큼 뱃심도 커져 있었다. 그의 머리통이 커지고 몸피가 굵어짐에 따라 그에대한 마님이나 아씨의 위압적이고 패악스럽기도한 행동들은 어언 소멸되어있는 터였다. 꾸지람 따위는 여전한 것이지만 호통이나 욕설 등은 훨씬 덜한 상태였다. 그리고 스는 집안일보다는 바깥일을 더많이 하였다. 실성이 보호정도가 아니어서 여전히 산송장과 같은 서방님의 뒤치닥거리와 군불 지피기와 마당청소 등은 변함없이 그의 차지였지만 그의 집안일은 별로 없었다. 바깥일이며 밖에 나와있는 시간이 더많았다. 집안에는 있고싶지도 않았다. 그는 일이 없어도 집밖으로 많이 나돌았다. 그리고 그는 자주 마을어귀 고개마루옆 산마랑으로 오르곤 하였다.
앞이 훤히 트인 산마랑에서 작은 바위나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조금도 싫증이 나지않았다. 절로 마음이 안돈해지는것도 닽았다. 하염없이 먼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자신이 서글퍼지기도 하였지만 조금도 그 모든것이 싫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때로는 그것자체가 위안이 되는것도 같고, 즐겁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읍내 쪽에서 울려오는 그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뗑그렁 뗑그렁 뗑그렁 뗑그렁…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해서 울려오는 소리였다. 맑고 고우면서도 힘찬 소리였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듯 하면서도 스스로 공기를 가르며 강하게 뻗어오는듯한 소리…
기섭은 신비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너른 들판을 지나고 내를 건너 산마랑에까지 달려오는 그 소리는 기섭의 가슴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리일까? 저 읍내의 어디에서 오는 소리일까? 무엇 때문에 나는 소리일까? 잇달아 빠르게 이는 그런 의문들은 그의 가슴에 강하게 파장하며 무너지는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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