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국적으로 「평신도 사도직협의회」가 조직되어 눈부시게 활약하고 있다. 이역사가 이뤄지기 백년, 아니 백오십년전의 「평신도의 활약」을 뒤져보기로 한다.
1801년 신유박해까지 아니 1794년 12월 17일 이 땅의 첫 신부 주 야고보 문모 신부를 영입하기까지 10년 동안 누가 뛰었느냐? 이승훈ㆍ이벽ㆍ정약전ㆍ정약종 정약용ㆍ권철신ㆍ권일신ㆍ최창현ㆍ이단원ㆍ유항검ㆍ윤지충ㆍ권상연 등이 전국각지에서 얼마나 뛰었는고! 매년 동지사 가는 길에 편지를 솜저고리 속에 숨겨가지고 북경을 드나든지 얼마였는지…. 갈 때마다 『신부가 모자라 보낼 수 없다』는 알렉산델드 구베아주교의 얼음장같이 찬 냉대를 받아 가면서도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뛰었기에 그들은 가시밭 속에서 구르고 얼음위에 뒹굴어가면서 거지로 행상으로 마부로 병신으로 하인으로 짐꾼으로 종으로 그들이 일천(日淺)생명을 내걸고 활약하였기에 주문모 신부를 모셔오지 않았던가!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0년만에야…
그것도 6년 만에 주 야고보 신부의 장렬한 순교로 종지부를 찍고 거기다가 또 3백여 명 순교자들의 붉은 피가 8도 강산을 핏물들게 하지 않았던가? 칼받기 직전 주 신부의 예언대로 이 땅은 30년이 지나도록 목자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1801년 4월 6일 정약종 총회장이 서소문밖 사형장에서 칼을 친구(親口)하고 스스로 칼을 목에 대어보며 『이제 나를 칼로 쳐 달라. 나는 순교자로 천국엘 들어가련다』하고 죽으니 그때 그의 둘째아들 하상 바오로가 겨우 일곱살이었다.
그가 약관(弱冠)이 되었을 때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용맹과 투지로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는 기둥이었다. 앵베르 범 주교의 편지는 『정 바오로는 실로 20번이나 북경을 드나들었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834년 마침내 이 땅의 두 번째 신부 유방제 신부를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안으로는 이광렬ㆍ이광현ㆍ최창현ㆍ이도다 등을 얽어매어 교회내외 대소사를 뒷받침하도록 조직을 짜 평신도로서의 텅빈 우리 교회를 지켜왔던 용감한 정 바오로. 그가 유방제 신부를 모셔오기까지, 또 조선교회의 초석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고생은 필설로 다 못한다.
북경주교에게 아무리 애원해도 매번 허사였기에 『에라 빽을 써도 한번 큼직한 빽을 쓰자! 이판사판인데…』하고 1811년 10월 29일자 교황성하께 올리는 탄원서를 직접 썼다. 그때 17세밖에 안된 바오로지만 이 탄원서를 보내는데도 앞장섰다.
그 편지를 북경에서 받은 리베이로 신부는 마카오에 체류 중인 수사 드 사라이바 주교님께 전해 드렸고 그는 그 편지를 포루투갈어로 번영하여 자기 본국 포루투갈주재 교황대사에게 보냈는데 교황대사는 그 편지를 교황 삐오 7세 성하께 올렸다. 그때 교황 삐오 7세는 나폴레옹의 비위를 거슬려 별궁에 감금되어 있었기에 탄원서를 받으시고도 속수무책이었다. 이일이 허사로 돌아가자 정 바오로는 다시 중론을 모아 1825년에 교황께 두번째의 탄원서를 올렸다.
그 편지가 육로로, 배로 포루투갈을 거쳐 1827년에 레오 12세 교황성하께서 입수하시게 되었다. 그분이 「빠리」외방전교회와 교섭하시던 중 세상을 떠나시자 그분 아래서 국무장관직을 수행하시던 추기경이 그 뒤를 이어 그레고리오 16세로 교황직에 등극하시자 곧 「빠리」외방전교회에 직접 명령하여 조선성교회를 도맡아 포교하도록 하시면서 1831년 9월 9일자로 북경교구에서부터 독립된 교구로 「조선성교회 교구설정」을 하시고 소 주교를 조선천주교회 첫 교구장으로 임명하셨다.
이리하여 정 바오로는 1835년까지 백방으로 우리 첫주교님을 모시려 하다가 성공치 못하고 1836년 1월 15일 모방 나 신부, 샤스땅 정 신부 제2대 교구장 범 주교님을 뫼셔들여, 주교 한분, 신부 세분(유방제 신부까지) 총회장 회장 교우 이렇게 팔도강산에 교계제도가 설정되는 영광을 갖게되었다.
또 정 바오로는 김대건 등 세 소년을 변문까지 바래다 주고 박해가 심한때라 미덥지 않아 이문우ㆍ이재용ㆍ최 프란치스코 등과 함께 장년 신학생으로 자진 발벗고 나서 범 주교님에게 한문으로 된 철학ㆍ신학을 최속성으로 배움의 길을 닦아 마카오에서 세 소년이 신부가 되어 오기 전 혹시 박해로 세 성직자를 잃어버리게 되는 불행이 오면 자기들이 그 뒤를 이으려고 작정했던 것이다.
1839년 9월 22일 서소문밖에서 정 바오로 하상은 칼 아래 순교하고 말았으니 그 후의 한국성교회를 누구에게 맡기시려고 훌훌 떠나셨는가? 실로 교구설정 백주년과 백50주년을 맞이할 때 세월은 옛과 지금의 차이가 있지만 평신도로서 이 교구설정을 보게 한 복자 정 바오로 하상은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동생 정 엘리사벳의 세 식구가 함께 복자도 되셨지만 「해피앤드」로 아름답고 영원히 빛날 성인이 되신다. 그것도 2천년가톨릭 역사를 깨고 서울 여의도에서 1984년 5월 6일에 성인품에 오르시니 그 영광하늘과 땅에 가득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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