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제사봉헌에는 떡(祭餠)과 제주(祭酒)가 있게 마련이다. 이 두 가지가 전례(典禮)에 있어 불가결한 봉헌물로 되어왔다. 희랍신화에도 바카스(Bacchus·본이롬은 디오니소스)는 곡식과 술의 神으로 알아 내려왔다. 또 탐욕의 신으로도 전승돼 오고있다. 이집트의 기원전 4·5천년 역사를 뒤져봐도 제사에는 술이 봉헌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중국에서도 신롱씨가 농사를 관리하는데 음식과 제사의 제물 가운데 제주(祭酒)가 불가결의 것으로 돼있다. 또 공자님의 제례식에도 꼭 술을 제물로 사용하는 것을 법도로 삼고 있는데 지금도 한국에서 차례 제사시 제주사용은 의당지사가 되었다. 송시열선생은 통제사의 번창한 제사절차를 간소화하면서도 제사 때 음식과 제주는 꼭 사용케 했다.
이태리의 향기 높은 백포도주로 「에스트 에스트 에스트」라는 술이 있다.
그 옛날 독일 어느 주교님이 로마로 가는 도중 추종자로 하여금 앞질러 가서 가는 곳마다 술맛을 미리 보게 했다. 좋은 술을 파는 집 벽에는「에스트」(EST있다)라고 써붙이게 했다. 그런데 몬떼피아스 군(郡)의 술을 미리 맛보고서는 그 맛이 너무 좋아 격찬하는 뜻으로「에스트 에스트 에스트」라고 세 번 써 매달았단다. 얼마 후 그 고장에 도착한 주교님은 술맛을 감별하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버렸다. 술맛이 너무 좋아서…그때부터 그 술에는「에스트 에스트 에스트」란 명칭이 붙게 됐다.
내친 걸음에 한마디 더해 보자.
「그리스도의 눈물」(CRYMA CHRIST)이란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포도주 이름인데、이태리「나폴리」근처에 있는 그 유명한 베스비우스화산 언덕에서 생산되는 백포도로 만드는 술、아주 향기 높은 술이다. 그 옛날 베스비우스산 중턱에 한 은둔자성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손수 만든 포도주를 길가는 나그네에게 대접하는 것을 일생의 큰 위로요 낙으로 삼고 있었다. 어느 날 악마가 그 술로 성자를 곯아떨어지게 했다. 그놈 악마는 이 성자의 정신과 마음 신앙을 파괴하려고 순례를 하는 나그네로 둔감、주거니 받거니 하며 성자를 곯아떨어지게 했다. 악마의 계략이 거의 성공되려할 바로 그때 폭풍우가 불어대고 뇌성벽력이 우르르 천지를 진동했고 악마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말았단다.
간신히 넋을 되찾은 은둔성자가 번개 친 그 빗물에 젖은 포도주를 맛보니 그때까지 시금털털하던 포도주가 기막힌 맛으로 변했다. 이 기상천외한 포도주맛의 변화는 그의 넋이 멸망하려던 순간、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눈물 때문이었다는 의미에서「그리스도의 눈물」로 이름 지어져 오늘까지 전해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돌려 미사주에 관해 엮어 본다.
예수님은 동양인이시다. 그래서 미사성제를 생각하시고 전례의 요소에 음식을 갖추어 인간의 육신생명에 고체 액체가 필요하듯 영혼을 양육하실때에도 고체음식과 마시는 액체음식을 가지고 천주성부께 미사성제를 드리도록 하시었다.
말하자면 동양식으로 제사를 집행하고 당신의 살과 피를 실제로 영함으로써 음복을 하라고 명하신것이다.
에집트에서 4백30년 기나긴 세월의 노예생활에서 3백50만 명 자기동포를 모세가 구출할 때 누룩없는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과월절」을 지내고 천추만대에 그 모양으로 행하라고 천주께서 명하신 그것을 예수님은 현실적으로 신약에서 실천하신 것이다.
1784년 3월 24일 우리 조선의 첫교우 이승훈이 입경하여 10여년간 주교·신부를 학수고대하는 가운데 준 교계제도를 편성하여 스스로 신부와 주교가 되어 1786년부터 88년까지 효과없는 미사성제를 지낸 일이 있다.
그때 포도주가 문제거리가 됐다. 급기야 산야를 더듬어 머루를 따다 짜서 포도주를 대용했다.
1790년 북경주교 알렉산드르 드 구베아 교구장이 곧 중국인신부 한 분을 파견하겠다고 약속하고 제구·제병 제작법을 가르치고 실지 포도주도 주시면서 포도주를 다 사용하면 산 머루를 물 넣지 말고 그것만 짜서 포도주로 사용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주문모신부를 맞이하는 준비 작업이었다. 그 후 1801년 5월 31일 그분이 순교하자 1834년 유방제 신부가 들어올때까지 이 땅에 미사성제가 거행되지 못하다가 1836~1839년까지 범 주교 나 신부 정 신부님 입국으로 제병과 포도주 걱정이 없었고 1866년 병인박해 끝까지 포도주 걱정없이 지냈다. 그러다가 10년만인 1877년 로베르또 김 신부와 까밀로 정 신부가 포도주를 가지고 입국했다. 1887년 5월 30일 한불조약이 체결되고 난 뒤 미사에 쓰이는 제병과 포도주 걱정은 안해도 되었다. 그런데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이포도주가 박해도 없는 자유천지 속에서 박해를 받았다. 1930년 필자가 신학생시절 방학 때 들은 얘기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많은 프랑스신부님과 독일신부님이 동원됐다.
그때 일이다. 포도주가 귀하게 된다는 핑계로 서울교구 경리부장 XX신부가 외국인과 한국인신부를 차등대우했다. 그렇찮아도 왜놈에게 이리 억암、저리 학정 받는 판국에 교회 안에서까지 포도주로 세력을 썼다. 프랑스신부에게는 1년에 12병을 한국신부들에게는 6병을 배급했다.
프랑스신부들과 한국인신부들 피정이 언어관계로 따로따로 하던 그때 포도주 사건이 터졌다. 그때 한국인신부 대표가 미리내 말구 강도영 신부였다. 설왕설래하는 동안 결말이 잘나지않자 막판으로 창고에 경리신부를 끌고 들어가니 산적한 포도주와 식사용포도주 백포도주 홍주 꼬냑 등이 코를 찔렀다.
『여기 넉넉히 있지 않느냐』고 따져도 모르겠다는 식이었다. 강 신부는 화가 나서 빨리 지하실 밖으로 나와 문을 덜컥 잠가버리며 『불란서 신부와 포도주차별을 하면 당신은 포도주 귀신이 될거요. 이 지하실속에서…우리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거기서 포도주나 실컷 마시고 살라』고 호령호령했다. 종당에는 이 사건이 민 주교님에게까지 알려져 경리부 XX신부가 호되게 꾸중을 듣고 다짐을 받고 지하실 감금서 풀려나왔다.
종교자유시대에 때아닌 박해、그것도 치사하게 포도주 가지고 민족감정 대립까지 갔으니、이것을 아니쓰려하다가 내 후대를 위해 『이런 우스꽝스런 술사건도 있었다』고 알리려는 의도서 썼다. 감금됐던 분도 후에 주교가 되고 그 후 은퇴하여 프랑스 남쪽 몽배똥 수양관에서 요양중 영면하시어 1974년 8월 12일 그곳 M·E·8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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