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 2월 24일 이승훈 베드로가 「北京」에서 영세한지 47년이 되는해, 즉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등극 1년만에 「北京」교구에서 완전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정하셨다. 이 사실은 정치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왼전히 독립되지 못했지만 종교상으로는 완전한 독립교구를 설정하심으로써 우리의 민족적 갈등까지 잘 배려하신 역사적 쾌거였다.
이에 교황성하의 「조선교구 설정」에 관한 칙서를 새삼 소개한다.
교종 (敎宗) 그레고리오 16세는 영원히 기념할 날을 맞아 이 칙서를 발하노라.
Ⅰ, 짐이 천주의 천상 안배하심으로 주의 모든 양의 무리를 돌보는 중임을 맡은지라 목자된 본분과 의무를 말하건대, 공번된 성교회의 중심지인 성베드로 성좌에서 멀고 먼 극변 원방에 거주하는 양들을 더욱 특별히 삼가 돌아봄이 지당한 줄로 헤아리노라. 그런즉 종도의 직무로써 마땅히 저 양들을 돌아보아, 하여금 영원한 목자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 양들이 마땅히 법다운 양의 무리에 있다가 다행히 천상 목장(牧場)에 물려 들어가기 위함이로다.
Ⅱ, 교황이 보내는 전교신부들이 마침내 조선지방에 혹시 들어갈 만한 희망이 적지 아니하니 전교신부들이 들어가서 그 지방에 사는 교우들의 사정을 도와주고 주의 포도밭이 되는 그 지방을 성교교리로써 가르치며 7성사를 행함으로써 돌볼 것이로다.
조선의 주민들은 청국이외의 딴 지방과 상종하는 일이 매우 드물고 극히 어려운지라 짐의 애경(愛敬)하는 제형(弟兄)들이며 로마 성교회의 홍의재상 (추기경)들 및 전교(포교) 성성장관의 의견을 좇아 조선지방을 교황대리교구로 설정하고 교황대리주교를 책정하여 북경주교로부터 온전히 독립케 함이 마땅한 줄로 여기노라.
Ⅲ, 이에 짐이 임명하는 교황대리 새 주교는 북경주교에게 조금도 속하지 않음을 선언하며, 중국 모든 지방과 그 인근지방 교황대리주교들에게 의례히 허락하여 주는 모든 신권(神權)을 또한 짐의 직권으로써 허락하여 주노라.
Ⅳ, 금일에 반포하는 이 칙서는 현재이든 이후이든 항상 완전하고 유효하며 유력함을 선언하고, 이 칙서는 완전한 효력을 발함을 결정 선언하노라. 또한 이 칙서와 이후 관계될 모든 당사자는 물론, 누구를 불문하고 모든 이는 이 칙서대로 굳게 서로 준행하기를 결정 선언하노라. 이에 누구를 막론하고 위에 말한 칙서를 알고 반대하든지 모르고 반대하든지간에 그 반대한 일은 온전히 무효이며 허망한 것임을 결정 선언하노라.
Ⅴ, 교황들의 이전 헌법이든지 법이든지 또는 특별히 드러나게 반포한 무엇이든지간에 금일 반포하는 칙령에 저촉됨이 없을 지니라
로마 성마리아 대성전에서
어부 (베드로사도)의 반지 교황의 옥쇄로 날인 반포하노라.
천추강생 1천8백3십1년 9월 9일 짐의 등극 1년.
참으로 금과옥조의 교황성하 칙서이다. 교구설정 1백주년이되는 1931년 당시 교회현황은 주교3위 교구장(신부) 2위 및 연길 교구장 도합 6위, 외국인신부 95명, 한국인신부가 서울교구 43명 대구교구 29명 평양교구 3명 도합 75명 이었고 교우총수를 보면 서울교구 5만2천9백49명 대구교구 3만8천7백99명 원산교구 4천3백45명 평양교구 8천2백75명 연길교구 1만2천3백26명 도합 11만6천6백94명이었다.
신학생현황은 서울교구가 대신학생 20명 예비신학생 68명이었고 대구교구 대신학생 18명 예비신학생 53명 원산교구 대신학생 54명 평양교구 대신학생 1명 예비신학생 16명 연길교구 대신학생 31명 도합 (예비신학생까지) 2백78명이었다.
1백주년 사업으로는 크게 3가지였다.
첫째, 서울대구교구가 각각 따로간진 「교회지도서」를 「전국 교회지도서」로 만드는 일이였다. 1931년 9월 13일부터 9월 25일 까지 위원 23명으로 한국 두번째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첫번째 조선교회 공의회는 1857년 성 다블뤼 안 부주교님 성성식이 성장주교님댁 근처 교우집에서 비밀리 거행된 그 다음날 3일간 열렸다. 그자리엔 최 토마 양업 신부님도 참석했다. 그때 간략히 만든 「지도서」를 토대로 교황사절 무늬대주교께서 주관하신 1백주년의 두번째 공의회에서 「전국교회 공동지도서」를 만들었다.
두번째, 「문답서」이다. 성세·고해·성체·견진 이 네 가지 성사만 가르쳤기에 「4본문답」이라 보통 불렸는데, 내용이 무척 부실하다고 지적당했고 시대가 많이 변해 말도 많이 변했다. 이 교리서를 개편·보완키 위해 윤형중 신부·이요셉 신부·양기섭 신부·주재용 신부·홍신부의 5인이 오랜 작업 끝에 「천주교 교리문답서」가 나오게 되었다.
셋째,「성모병원」을 개설하는 문제였다. 이 사업은 서울교구에서 맡게 되어 1930년 중반에 마침내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 그것이 발전을 거듭하여 명동구 내외에도 강남에 또 다른 성모병원과 여의도에 정신병원을 가지게 되었다. 1백주년 기념사업이 중앙의료원으로 면모를 갖추고 2백주년의 오늘까지 번영을 일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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