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바르바라와 이연희 마리아의 집안은 모두「순고일가(殉敎一家)」로 어떠한 신앙의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나타내 주었다. 이미 기해년 7월 20일에 순교한 이영희 막달레나와 이매임 데레사는 바르바라의 동생이요 고모였으며, 그보다 앞서 15세의 어린나이로 순교한 이 바르바라와 후에 순교한 허계임 막달레나는 그녀의 조카요 모친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집안을 볼때 바르바라 자신이 신앙의 교리를 깨닫고 열심히 실천학도 하였지마, 그녀의 가족들이 더욱 그 신앙의 길을 북돋아 주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바르바라는 당시 시흥군(始興郡) 봉천리(奉天里)에 살던 가난한 양반의집 딸로 1799년(정조23년)에 태어났다.
교우인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바르바라도 오직 교리만을 따라 생활하였지만, 완강한 외교인인 부친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수계생활에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차차 장성하여 감에 바르바라는 수정(守貞)할 뜻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내심을 알지 못하는 부친은 그녀가 시집갈 나이가 되자 어떤 외교인 청년과 마음대로 정혼하였다. 이같은 혼인에 양심을 속여가며 동의할 수 없다고 단단히 결심한 바르바라는 갑자기 다리를 못쓰게 되어 일어날 수가 없는체 하였다.
이래서 그녀는 늘 앉거나 누워있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혼인이 연기되 후에도 3년동안이나 그 고통을 견뎌내는 항구심(恒久心)을 보여 주었다. 3년이 지나자 그녀의 약혼자는 병이 낫기를 기다리는 데 지쳐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녀는 외교인과의 혼인을 피할 수 있었으니, 사실 그러한 인내와 고통은 열성적인 신앙의 힘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한편 그녀의 굳은 결심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는 동생 막달레나가 동정을 지켜 순교하는 데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 후 바르바라의 실제사정을 잘 알고 있던 어떤 교우 청년이 청혼을 하여 승락을 받고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다. 바르바라는 외교인인 부친 밑에서 동정을 지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 여겼으며, 그럴바에는 같은 교우와 결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였던 듯 하다.
결혼한 지 2년 후 그녀는 남편을 여의고 우선 친정에 돌아왔다가, 그 다음에는 서울에 있는 고모 이 데레사의 집으로 가서 살았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바르바라는 그후 고모의 집에서 모친과 동생, 그리고 다른 여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기해년 4월 포청에 자수하여 신앙을 증거한 다음, 9월 3일에 41세의 나이로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녀가 받은 형벌이나 고문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나, 앞서 순교한 가족들 처럼 그녀도 용감히 형벌을 참아받았으리라 쉽게짐작이 간다.
이연희 마리아의 어렸을적 내력은 밝혀져 있지 않으나 그녀의 본성은 총명하고 강의(剛毅)하였다 한다. 이미 기해년 5월 24일에 순교한 남명혁 다미아노 회장이 그녀의 남편으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주교와 신부들을 집에 모셔와 첨례(瞻禮) 보기를 좋아하였다. 교우들이 자기집에 모일 때에는 모든 것을 갖추어 주교와 신부를 공궤(供饋)하고 교우들을 가르치며 그들이 타당히 성사를 받도록 열성을 기울었다.
이러한 그녀의 모범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끌었으며 남편의 직문을 보다 용이하도록 도와 준 것이었다.
거해년 4월에 마리아는 남편과 12세된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옥에갇힐때에 그녀는 포졸들의 무례한 언동을 준절히 꾸짖었다.
그러나 남편 다미아노로부터『교우는 천주를 위하여 순량한 양같이 죽어야 하는 것이니 이러한 훌륭한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주의를 듣고는 모욕과 학대를 참아받았다한다.
마리아의 어린 아들이 신앙을 지켜 고문을 이겨낸 사실은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그 아들이 받는 고통은 그녀의 모정을 더욱 괴롭혔던 것이다. 포졸들은 그녀의 아들을 형벌한 뒤 잔인스럽게도 웃으면서 이 가엾은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이때마다 그녀는 육신의 아픔을 참고 아들이 배교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였으며, 『이것은 주님의 가장 크신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라 생각하여 조금도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아니하였다.
당시 이러한 마리아를 본 어떤 증인은『그녀는 마음을 송두리째 바쳐 천주를 진실히 사랑하였고, 그 영혼의 원(願)은 오직 천국을 향하여 있었다.』고 하였다. 그녀는 이렇게 신앙의 힘으로 어떠한 고통도 참아내었다. 그리하여 옥에 있은지 몇 달 후인 9월 3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니 그녀의 나이 3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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