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베르주교의 본명은 라우렌시오이며 한국성명은 범세형(范世亨)이다. 1796년 프랑스 까브리에(Cabries)지방의 조그마한 촌락에서 태어난 그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총명할뿐 더러 기도나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묵주 만드는 법을 배워 공부를 하는 한편 나이 많은 부친의 생활에도 보탬을 주었다.
그가 마음속에 동방의 포교지방에 대한 생각을 갖고 신앙을 전파하러 갈 결심을 굳게 다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액스(Aix)대신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그리하여 그는 빠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한 후 1819년 12월 18일 신품을 받고 곧 중국의 사천성(四川省) 포교지에 임명되어 프랑스를 출발하였다.
앵베르 신부는 12년이상을 사천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그는 포교를 행하고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모든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고 또한 조선이라는 포교지에 파견될 것을 열렬히 희망하고 있었다.
열정적인 노력으로 그는 1836년에 조선의 제1대 교구장 브뤼기애르(Bruguire 蘇) 주교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주교가 사망하자 곧 주교품을 받고 조선의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해에 조선입국이라는 열망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12월 17일 중국대륙을 건너 몽고의 서만자(西灣子)에 머물고 있던 그는 마침 조선사신의 수행원 중에 동행한 교우 조신철(趙信喆) 정하상(丁夏祥) 등의 협력을 얻어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교우들은 처음으로 주교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실로 조선교회가 창설된지 53년 만의 일이었다.
3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운 후 앵베르 주교는 듣고서 성사를 줄 수가 있었다. 이미 조선에 와 있던 모방(Maubant) 신부와 샤스땅(Chastan) 신부와 함께 그는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영세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제 조선교회는 오랜 재난을 겪은후 새로 재생하는 셈이었다. 천주의 은혜는 점점 더 풍성하여지고 신자의 수는 급격히 불어났다. 착한 신자들은 위로를 받고 약한자들은 신앙이 굳어지며 죄인들이 회개하고 변질자들은 다시 주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희망하는 결과를 얻기 위하여는 그만큼 노력이 뒤따라야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스러운 의무를 다하였다. 그가 프랑스에 보낸 서간에서처럼 그는 항상 허약하고 병든 몸으로 매우 바쁜 생활을 하였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에게 있어 고생과 곤궁보다도 무한히 괴로운 것은 박해로 말미암아 신입교우들의 신앙이 끊임없이 위험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외교지방에 전교의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리기 위하여 보다 많은 피를 흘려야 된다는 주교의 생각대로 박해는 기해년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교우들은 체포되었으며 그들이 흘리는 거룩한 순교의 피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퍼지기전에 보다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교우들이 모여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는 동안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되어갔고, 배교자들의 자백으로 3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배반자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간계로써 주교를 유인하려고 하였으며 주교는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자수의 길을 택하였다. 다른 두 신부들도 주교의 권교를 받아들여 즉시 관청에 자수하였다.
포청의 옥중에서 세 선교사는 서로 만날수 있었다. 이미 주교는 여러 번의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며 두 신부들과 함께 옥중의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정부는 그들이 절대로 배교치 않을 것이라 믿고 마침내는 대역죄인(大逆罪人)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軍門梟首)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그들의 사형지는 서소문 밖이 아닌 한강변의 새남터로 결정되었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그들은 군인들에 의해 손을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군사들은 그들의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태연하게 천상의 기도만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군사들이 칼날이 그들에게 순교의 영광을 가져다 주니, 때는 1839년 9월 21일로 주교의 나이는 43세였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불과 3년만에 잃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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