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 12월 9일 교황께 첫 번째 탄원서를 올렸으나 영어의 몸이 되신 삐오 7세 교황께서「폰뗀블로」궁에 감금된 신세라 그것을 받아보셨건만 별 효과를 나타내지 못했다. 1811년 1813년 두 번씩이나 북경으로 밀서를 가지고 간 권계인과 이여진은 좌절감에 못 견디어 제2선에 물러났다. 이여진은 1830년 봄에 병으로 타계했고 권계인도 책임을 지고 제2선으로 물러섰다가 1814년 3월에 47세로 타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01년부터 1816년 사이 다시 조선교회에 공백 기간이 생기는 암운이 가로 덮였다. 그때 분연히 교회재건운동에 나선 분이 우리 정 바오로 하상이었다. 그는 다시 목자 없는 설움을 천사만감(千思萬感)으로 적어드리는 두 번째「교황께 올리는 조선 교우들의 탄원서」를 가지고 친히 북경으로 달려갔다. 혼자 가는 것이 외로웠기에 아직 예비중인 유진길과 조신철을 데리고 가서 북경에서 그들을 영세 견진까지 시키는 쾌재를 올렸다. 이 세분이 이번에(1984년 5월 6일) 성인이 되시는 영광을 받게 된다. 이제 1825년에 교황께 조선 교우들이 두 번째 올린 탄원서를 여기에 실어 독자들의 원을 풀어드리고자 하는바 이다. 그렇게 보고자 하던 이 금쪽같은 고문서를 159년 만에 펴드리는 것이 필자로서는 더없는 영광이요 기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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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회중 암브로시오(註: 권철신)와 모든 교인 등이 교종(敎宗) 폐하께 백배 고두감사(叩頭感謝)
1천8백 년 전에 오 주 예수 강생구속하사 죽으신 후, 부활하사 승천하신 후 항상 성현과 성사(聖士)들을 내시어 복음을 세계 궁벽한데 내시어 전파하여 캄캄한데 앉은 자를 비치게 하심이로다.
그러므로 우리 조선이 비록 비루한 지방이나 다행히 생명의 말씀을 듣고 영세하며 오 주예수의 구속공로에 힘입게 되오니 주의 인자하심을 천만번 감사하여 간단함이 없거니와 근심걱정 및 환란이 많기로 부득이 교종폐하께 알리오니 굽어살피사 허락하옵소서.
주 신부(주:주문모 신부) 치명한 후로 조선성교회는 군란을 연이어 만난고로 교화(敎化)가 널리 펴이지 못하고 겨우 몇 천 명 교우가 서로 은근히 전교하니 효험이 적은 모양이나이다.
도리(道理)는 우리 명오가 둔하와 알아듣지 못하오니 별로이 유익을 모르옵고 노인과 병자들은 성사의 은혜를 받지 못함으로 슬퍼 탄식하며 죽고 살아있는 우리들은 근심걱정으로 마음이 더욱 나약하오이다. 이러므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북경 우리 감목에서 몇 사람을 보내어 간절히 신부 보내 주시기를 청하여 죄인 등의 마음을 성사의 은총으로 건장케하려 하오나 이루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전혀 우리 죄의 벌이오매 남을 감히 탓하지 못할 줄을 승복하나이다.
우리나라 교우수는 주신부때와 같사오나 우리들의 재앙은 이루 다 말씀드릴 수 없는 영혼사정이오이다. 「마카오」에서 전교하는 신부가 우리를 돌볼만은 하오나 타국과 직접 통섭(通涉: 서로 왕래함)할 수가 없나이다.
지존하신 교종폐하께 급박하온 두 가지 사정을 감히 아뢰옵나이다. 두 가지 사정은 서로 나눌 수 없삽나이다. 만일 사람이 여러 날을 굶으면 불가불 죽는 지경에 이르옵고 방금 죽는 지경에야 만반지수가 있사온들 무삼쓸데 있사오며 몇 달 먹을 것을 장만하여 둔다한들 당장 굶는대야 무삼 위로가 되오리까. 우리에게 탁덕을 빨리 주심이 큰 은혜이오며 우리 즐거운 생명의 근원이오이다.
만일 지금 훗길을 트지못하면 우리 자손들은 더군다나 어떻게 구령되오리까. 우리 불쌍한 신자들을 긍련히(註ㆍ가련히) 여기지 않으시고 일상 버려두시려 하시나이까. 우리 사정이 한없이 급박하오니 목자를 먼저 보내사 매사를 돌보게 하시고 그후 서양배를 보내어 조선에 있는 목자와 만나 범사(凡事ㆍ모든일)를 상의하면 성교 광양되기에 좋은 문책이 될듯하외다.
조선이 비록 우매하나 남의 재능을 업수이 여기나이다. 그러하오나 서양인은 재능이 과인(過人〓뛰어난 사람)하고 높아 신출귀몰한 줄로 전부터 짐작하는지라 만일 뜻밖에 서양배가 이르면 모든 사람이 황황(마음이 몹시 급하여 허둥지둥하는 모양)하여 어찌할 줄 모를것이요 양인의 재주와 기개를 진실로 보면 과연 항복할 터이오이다. 만일 조선이 서양인을 해할 지경이면 먼저 천자(中國의)께 청할 일이나 천자는 서양배오는 것을 상관치 아니할테이오이다. 그것은 조선이 비록 적으나 풍속 및 정치가 대개 중국과 다르고 또 중국에 속한 나라라도 예부터 모든 권리가 다른 속국과 같이 온전히 매이지 아니하였는데 온전히 기인하나이다. 북경주교신부를 조선에 보낸다고 해서 모든 관장이나 백성의 앞에 드러나게 다니며 전교할 수는 없는 고로 성교가 빨리 퍼져 널리 행해지기 어렵사 오이다. 성교사기(聖敎史記)를 보아도 각국에 성교가 들어가던 시말이 매양 배로 내왕하여 차차 널리 펴이며 행했나이다. 우리나라는 버려진 것과 같아 지옥에 빠지는 영혼을 능히 측량치 못하나이다. 아무리 우리가 대악일지라도 오 주 예수의 구속공로 풍성하오니 이 지방을 특별히 불쌍히 여겨 영원한 죽음에서 구하여 주시기를 천만번 복망(웃어른의 처분을 바람)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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