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 신부의 한국姓은 나(羅)씨이고、이름은 본명인 베드로를 한문으로 표기하여 백다록(伯多錄)이라 하였다. 1803년 9월 20일 프랑스「배시」(Vassy)지방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적부터 열성적인 면과 부지런함이 뛰어났다. 그리고 항상『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다』고 말하였으며、이러한 전교의 의지는 결국 그의 일생을 통하여 실현될것이다.
1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된 후 그는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선교사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3년뒤에 중국 사천성(四川省) 포교지에 임명되었다. 포교지로 가던 도중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를 만나게 되었는데、이때 조선의 상황을 듣고는 곧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주교는 그의 경건함과 열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주교가 조선입국을 목전에 두고 만주에서 선종을 하자、그는 당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하여 그곳에 와 있던 조선교우 5명을 만나 그 자신이 조선에 입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천신만고끝에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 때가 1836년 1월 12일로 그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선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다도 입국한 첫해에 그가 겪 조선에 입국한후 모방 신부는 조선어를 배우려고 노력하였으나 교우들의 요청으로 우선 한문으로 성사를 주기시작하였다. 서울에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경기도와 충성도의 16내지 17개 교우촌을 돌며 포교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해 12월까지는 어른 2백13명에게 영세를 주고 6백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줄수있었다. 또한 가는 곳 마다 회장들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으도록 하며、모임에서는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고 교리문답과 복음성경과 성인전기등을 읽고 배우도록 지도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대왕대비 김씨가 섭정(攝政)을 하고 있었는데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어 1836년에는 모방 신부에게서 교리를 배운 교우들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숨어사는 교우들의 비참한 생활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입국한 첫해에 그가 겪은 가장큰 고통과 시련은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에 대하여 성무정지(聖務停止)처분을 내린 일이었다. 부도덕과 타락으로 채워진 유 신부를 충고하기도 하고 제재도 가하면서 본래의 사명을 일깨우려 하였지만、그가 끝내 듣지 않았으므로 모방 신부는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권한을 행사할 수 밖에 없었다.
모방 신부의 활동중 특기해야 할 것은 한국인 성직자 양성이었다. 그는 최양업(崔良業) 토마스、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꼬、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등 세 소년을 택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 필요한 덕행을 쌓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하에서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음을 알고 1836년 12월 2일에는 이들을「마카오」로 보내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게 하였다.
이들은 먼 해외로 파견되어 서양학문을 배운 최초의 조선인들이었으며、후에 그들이 귀국하면서 조선의 천주교는 또 다른 전기를 맞아 새로운 발전을 보이게 되었다.
이듬해 1월 15일 샤스땅(Chaslan)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모방 신부는 서울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천주를 숭배하고 자신들의 생명을 희생하려는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모방신부는 곧 양평(楊平)지방으로 내려가 전교를 하는 동시에 조선어를 다시 배우기 시작하였고、그런 다음 조선어로 성사를 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몸이 쇠약해져 있었으며、결국 남쪽지방으로 내려가 포교를 하던 중 열병에 걸려 신음하게 되었다. 서울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절망적이었으므로 샤스땅 신부로부터 종부성사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차도가 있게 되었고、3개월 동안 치료한 끝에 완전히 회복되어 다시 포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모방 신부가 샤스땅 신부와 함께 설교에 노력하고있던 1837년말 드디어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게 되었고、이후 1839년까지 그들의 활동은 어느때보다도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해년에 이르러 정부는 다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 하였으며 이에 선교사들도 그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결국 주교가 체포되고 주교의 권고로 신부들도 자수하였다. 모방 신부는 홍주(洪州)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포교지 조선에서의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하였으며、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사명의식을 잃지않고 주님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9월 21일 새남터에서 천국에 오르니 이 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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