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 가지뿐인 십자가를 남겨놓았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야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죽음의 현장」「사형틀」이 있던 십자가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요, 우리의 유일한 삶의 초점이 된다.
첫째로 그 십자가는 하느님의 공의성(公義性)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하느님은 인간이 범죄 했기 때문에 그 죄의 보상을 치루지 않고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뜻이 없으셨다. 그러니 그 죄에 해당되는 벌과 보상을 치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보상하기 위해서 돌아가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 정확하시다.
하느님에게는 적당히 통하고 또는 어떤 공짜의식도 있을 수 없는, 철두철미 공의하신 분이심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신다.
오늘 우리 시대에 소위 「사회정의」니「정의로운 사회」니 하는데 그 정의의 근원이 무엇인가 그 정의와 불의를 판단할 절대정의의 원천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은 구호로 끝나고 만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칸트도 그의「실천이성 비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소위 윤리적인 선이니 의리니 하는 기본개념을 갖기 위해서도 하느님은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정의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존재가 희미한 사회에서는 그 정의의 질서가 희미할 수밖에 없다. 「의리냐? 돈이냐?」하는 문제를 놓고 영원한 절대적인 의리의 가치를 모르는 사회에서, 그리고 정의와 불의를 있는 그대로 심판할 절대 심판주가 없는 사회라면 누가 감히『돈보다 의리가 더 중요하다』고 하겠는가?
그러니 크리스챠니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주는 것도 큰 의미가 있지마는 인간이 인간답게 대우받는 사회건설을 위해서도 그것은 필요하다.
절대원칙이 밑바닥에 깔려있지 않는 오늘 우리 사회는 입으로만 「정의」「의리」하지마는 그 기본의미가 없고 더구나 그 정의의 촛점이 없지 않는가?
정당하게 불의한 처사를 한번하면 일확천금이 들어오는데「의리」때문에 그 일확천금을 놓쳐야하는 그「의리」의 가치가 무엇인가. 선인이 되어야 하고 의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마는 선과의의 그 궁극적인 의미가 없는데 그것이 무슨 뜻이 있겠는가?
그러니 이 사회구원을 위해서, 내 개인의 양심적인 구원을 위해서도 절대자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십자가는 일단 하느님이 정의의 원천이심을 일러주고 모든 원리도덕 인간관계의 바탕은「정의」라는 원칙을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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