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마을어귀 고개마루에 다다른 기섭은 잠시 발을 멈추고 심호흡을 하였다. 잰걸음으로 고개를 오른 탓에 이마에 땀이 솟아 있었다.
그는 군용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한 옆의 산마랑을 쳐다보았다. 지레 진한 반가움과 뜨거운 감회 같은 것이 솟구쳐서 무놀지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산마랑으로 오르지는 않았다. 몸을 돌리고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을 바라보며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줄곧 마을 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가슴에 가득 안기곤 하였다. 정다우면서도 울울한 바람이었다. 가을걷이가 모두 끝난 논밭들에는 텅 빈 허전함이 감돌면서도 한가로움이 차분히 내려앉아 있는듯하였다. 마을 뒷편의 산세가 수려한 금학산은 온통 붉은 단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옆으로 길게 깔리는 저녁 햇빛과 잘 어우러져서 금학산의 단풍빛은 한결 붉게 타오르는 듯, 현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금학산의 너른 자락에 포근히 안긴 듯이 있는 고색창연한 큰 기와집은 짙은 정적에 싸여있는 것 같았다. 집 앞 너른 마당가의 키 큰 미류나무에 있는 까치집 주위에서 까치들만이 정적을 깨며 있는 듯이 보였다.
마을이 온통 정적에 싸여 있었다. 저녁 무렵이라지만 너무 이른 정적이었다. 마을길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눈에 띠지 않았다.
기섭은 마을이 너무 조용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상한 두려움과 긴장감이 가슴에 안겨들었다. 바깥세상 소음이 있는 곳에서 살다가 오랫만에 소음이 없는 곳으로 돌아왔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섭섭한 마음이었다. 결코 오롯이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첫 휴가를 얻어 1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는 자기를 강아지 한마리도 반가와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섭섭하고도 서글픈 일이었다. 그는 마을 어귀 고개 마루를 오르면서부터 군인이 된 자기의 모습을,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고 마을에 척 들어서는 자신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되기를 기대하였었다. 자신을 마을사람들이 반가와해 주지는 않더라도 모두 보게 되기를…. 그래서 군화에 밟히는 돌모래의 신음들을 들으면서 잰걸음으로 고개를 올랐던 것이었다.
기섭은 1년전 군에 입대할 때도 야릇한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슴이 벅찼었다. 자신에게도 호적이 있고 자신도 군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는 징집검사를 받을 때부터 사고무친하다는 이유로 입영대상에서 제외가 되면 어쩌나, 몹시도 마음 졸였었다. 사람들의 말로는 그가 군에 갈수도 없고, 얼마든지 면제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영장이 떨어졌다. 사람들은 뭐가 잘못됐다고도 하였지만, 그는 다행스럽기만 하였다. 기쁘기 그지없었다.
호적이 늦게 되어 실제 나이 스물세살에 입대하게 된 그였다. 스물세살 나이에 처음으로 고향을 뜨고 바깥세상을 구경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바깥세상과 군대생활에 대해 야릇한 기대를 가졌다. 앞날에 대한 희망이었다. 바깥세상을 돌아보고 군대생활을 겪고 나면 자신의 모습과 삶에 어떤 변화가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
기섭이 입대하던 날, 마님은 몹시 서운해 하면서도 무엇을 체념하는 듯한 빛이었다. 기섭을 아주 영영 놓쳐 버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본새였다. 그러나 마님은 기섭이 떠나던 날, 기섭에게 매우 중대한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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