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무엇인가?」이 문제를 두고 동양인들은 사람은「만물의 영장」이라 하였고 서양인들은「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정의하였다. 이 두가지 표현은 사람을 다른 피조물들, 특히 동물들로부터 구별하고 사람을 고유하게 특징 지워준다. 이러한 사람에 대한 정의들은 사람의 외부적인 됨됨이를 개괄적으로 묘사하는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활동과 자립을 통해 생동적이고 건설적인 사고와 표현을 펼쳐가는 사람의 유기적인 내적실재를 밝히려 한다.
사람을 보다 소상하게 묘사하자면, 『동물적이고 지성적인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지능과 의지력의 활동을 통하여 개채적이고 영성적인, 그리고 자활적이고 결정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이성적 동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마치 누에가 뽕을 먹고 자라서 고치를 만들어 놓은 다음 나비로 변화하는 것과 비슷하게 사람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만물에서 물질적 및 정신적 자양을 취하고, 그것들을 올바르게 또 알맞게 사용함으로써 인간본성에 주어진 규범대로 지식과 의욕을 끊임없이 하나되게 하여 영성적 존재로 성숙하고 완성되어야 할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의 삶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동물성과 이성을 함께 구비한 인간은 육체적인 완성과 함께 영성적인 완숙에 이르기 위해 동물적이며 정신적인 삶을 이끌어 가고 있다. 사람은 주위의 피조물들로부터 영양을 섭취하여 육체적으로 성장해간다. 그런가하면 그는 이 육체적인 기관들을 거쳐 받아들인 피조물의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지능과 의지력의 초 물체적인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자신의 영성적인 인격을 완성하기 위하여 태어났다.
이 인격적 성장, 즉 완성이란 사람이 자신과 관계하는 피조물들과 만물의 근원이요 창조자인 하느님을 알고 또 이 모든 것과 일치하는 규범대로 행동함으로써 되어야 할 것이 되는 데 있다. 이와 같이 모든 면에 비추어 볼때,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알고, 찬양하고 사랑하며 또 그분 안에서 모든 이웃과 만물을 인식하고 사랑함으로써 자아완성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살고 있다.
사람이 한동안 이렇게 지식도 넓히고 활동도 함으로써 육신과 영혼의 성숙을 이루다가 언젠가는 그 동물적 기능이 정지되고 영혼의 건설적인 행동도 멈추는「죽음」에 이르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며, 또 이 죽음으로 사람의 동물적인 요소는 사라지고 영성적인 요소는 그가 이제까지 가꾸어간 삶의 내용에 따라 고정된 불사불멸체로 남아 있음을 체험과 이치로 알 수 있다.
이 고정된 열성적 존재로서의 사람은 더 이상『완성도중에 있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형성된 인격적 존재』로서 생존한다. 만일 그것이「선혼」즉 제대로 이루어진 완성품이라면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완성도상의 삶에서 마주치는 영성적 완성을 가로막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에 지나치게 기울어지지 않고 벗어나는데에 따라오는 고통ㆍ환난ㆍ투쟁ㆍ극기ㆍ희생 등이 뒷받침했던 그 참됨과 옳음에 대한 사랑, 인간과 신음에 대한 위격적인 사랑을 갖고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 중에 위안과 평화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악혼」이라면 즉 되어야 할 것이 되지 못하고 우주의 원칙과 본질적 구조 규범에 어긋나게 생활함으로써 잘못 이루어진 존재라면, 이 영혼은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형성된 괴물처럼 본성적인 본질과 그와 반대되는 실존적 현실 사이에 서 있는 모순적 실존이 될 것이다. 인생의 본연의 과제인 영성적인 최종 목적을 거꾸로 함으로써 즉 자신의 본질적인 목적과 수단을 역행하는데에도 의식적으로 물질과 이기주의의 언저리에서 서성대다 하느님과 등진, 이 빗나간 존재는 하느님의 사랑에로, 즉 영원한 행복에로의 부름에 배반한 자신을 보며, 가없이 부끄러워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온 삶도, 그것으로 짜여진 현재의 자신도 또 우주의 모든 것도 자신과 관련된 만큼은 무의미함을 직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자신도 우주도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태어나서 실현된 인간의 완성과 피조물들에 공헌된 하느님의 영광과 더불어 하느님께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음을 직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적이며 내적인「최종목적」은『하느님과의 친교중에서 이루어져야 할 사람의 영생적 완성』이라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계시의 표현을 빌어 말한다면『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되었다』(창세기1ㆍ26~27참고)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의 견지에서 대체로 살펴본 인생관이다. 이러한 인간의 완성은 모든 이에게 꼭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람의 모든 것은, 생활도 학문도 예술도 다 이것을 지향하고 도울 때에만 삶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이점에 있어서 실패했다. 이성이 동물성에 주도권을 넘겨줌으로써 종속체를 주체로 착각함으로써 수단과 목적을 전도함으로써 사랑은 자기의 본연의 목적을 포기한 셈이다. 따라서 인류는 주어진 햇빛도 신선한 공기도 풍부한 영양소도 싫다하고 스스로 택한 땅굴옥(지하감옥)의 수인들이 된 것이다. 그들은 눈을 뜨고도 우주만상을 볼 수 없는 우주의 원리와 인생철리에 캄캄한 소경이 되었으며, 귀를 가지고도 양심과 만물을 넘나드는 창조자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었으며, 정신이 멀쩡하면서도 하느님이나 이웃과는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벙어리가 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인류는 스스로 하느님의 슬하를 떠나 무작정 가출한 탕자들이 된 것이다.
그들의 사회에는 올바른 인생관도 믿을만한 진정한 종교도 있을 수 없었으며, 설사 주어졌다 하더라도 받아들여 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암흑상태에서, 평화도 행복도 희망도 없는 내리막길에서, 인류는 무엇인가 구원을, 누군가 구원자를 그리며 갈망했으리라. 이러한 전망에서 계시적 구세자 또는 그리스도적 인생관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인간적인 사고방식에 비추어보면 사람이 고귀한 삶을 내려보고 저열한 것들에 솔깃해진 나머지 하느님의 낙원 가정을 뛰쳐나와 방탕의 길로 나서자 우리를 사랑하는 하느님은 보시다 못해 집 나간 아이들을 뒤쫓아 오신다. 마침내 하느님 아들이 철없고 고집 센 어리석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길러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도로 데려가기 위해 우리의 세계로 오신다. 그분이 오셔서 인간적인 교육방법으로 쉽고 낮은데서 어렵고 높은데로 점진적으로 인류를 가르쳐 성숙하게 하신다. 그분은 세상에 새로운 생명수를 심는 식으로 인류공동체에 새 생활운동을 일으키시고 당신 자신이 그 모범을 보여 주신다. 그는 우리에게 인생철리와 하느님의 뜻대로 삶으로써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며 진리인 동시에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 안에 사는 새 생명이 되어주신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냉담한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켜 성령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계시적 구세사업을 완수하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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