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집안에서는 언제나 박해의 시련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그들은 박해의 위협을 받아왔고 또 언젠가는 그것이 무서운 현실로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그들은 때때로 그러한 시련을 두려워하여 배교하거나 피신을 하곤 하였다. 한편 이러한 시련과 배교의 유혹을 벗어나 영원한 안식처를 얻는 길이 곧 순교의 영광이었으니 김제준 이냐시오도 이 길을 택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김이냐시오는 1814년에 참수 치명한 김진후(金震厚)삐오의 손자요、1846년에 순교한 신부김대건(金大建) 안 드레아의 부친으로 여러 차례 박해를 당한 서민의 집에서 1796년(정조20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는 충청도 면천 솔뫼라는 산골에서 살았으나 그 후 내포의 놀매라는 곳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결혼을 하고 아내 우르술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1846년에 참수를 당한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이다.
신심이 두터운 교우로서 이냐시오는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맡긴다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였다. 그리하여 15세 된 안드레아가 모방 신부에게 선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도 아들이 외국에 나가는 것으로 인하여 남은 가족들에게 다가올 온갖 고난을 감수하면서 이를 허락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그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관헌의 눈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기해년 9월 중순 그의 사위의 인도를 받은 배교자 김여상이 포졸들을 이끌로 그의 집으로 몰려왔다. 증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기운이 장사였기 때문에 이들을 대적할 수 있었으나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체포되었다한다.
포청으로 압송된 이냐시오는 사학을 신봉한다는 이유와、아들을 외국으로 보냈다는 이유에서 국사범으로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들을 외국으로 보냈다는 큰 죄목은 벗어나지 못하고 사형선고를 받아야만 하였다. 옥에 있는 교우들은 배교의 죄가 실로 크다는 사실과 또한 그것으로는 석방될 수 없다는 이유를 설명하여 『마음을 돌려 당신의 잘못을 고백한 다음 재판관 앞에 나가 배교하겠다는 말을 취소하고 순교자로 세상을 마치도록 하십시오』라고 권고하였다.
교우들의 권고로 마음의 평안을 되찾은 이냐시오는 형조에 출두하여 배교한 것을 취소하였으며 이에 세차례나 혹형을 당하였으나 다시는 마음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분명 이것은 주님의 은혜가 그에게 내려져 용기를 내도록 한 사실을 말해준다.
이렇게 하여 그는 다시 주님의 섭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며 마침내 9월 26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이때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박봉손 막달레나는 외교인 집안에서 1796년(정조20년)에 태어났다. 15세에 같은 외교인에게 출가한 후 두명의 딸을 낳았으나 얼마 아니하여 남편을 잃고 서울 친정으로 돌아왔다. 이때 친정에는 김체칠리아라는 훌륭한 여교우가 계모로 들어와 있었는데 막달레나도 그녀의 권고로 입교하게 되었다.
입교한 후 그녀는 남대문 밖 이문골에 있던 외삼촌댁으로 가서 이미 거기에서 살던 가난한 사람 몇 명과 함께 생활하였다. 막달레나는 곤궁한 생활을 하는 중에 어떠한 시련을 당해도 마음이 한결같고 뛰어난 겸손을 보여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
가장 나쁘고 어려운 일은 도맡아 하고 유쾌하고 좋은 일은 남들에게 남겨주었다. 당시 그녀의 한가지 걱정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열렬한 애덕의 본분이 소홀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박해가 시작되자 막달레나는 전 경험、김 유리대 등과 더불어 순교의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39년 3월 다른 날처럼 집안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결박을 당한 채 포장 앞에 출두하자 포장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배교하고 책과 동료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위협하였다. 이에 그녀는『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읍니다. 내 집안사람들은 나 모르게 도망하였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수 없으며 책은 가진 것이 없고 교우들의 일은 아는 바가 없읍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포장이 주뢰를 틀며 고문을 가하고 재차 문초하였으나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배교의 위협은 마찬가지였다. 막달레나는 여전히 굳은 마음과 함께 순교의 의사만을 표명하였으며、세 차례나 혹독한 매를 맞은 후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마침내 서소문 밖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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